디올라 종족은 넓게 흩어져 있다. 대부분이 아이보리코스트에 거주하나 더러는 부르키나파소, 말리, 가나 그리고 기니비소 등지에 살기도 한다. 동부에서 기니비소로 이주한 경우도 있으며 1400년 경 포르투갈인들이 노예무역의 새 지경을 개척할 때 노예로 들여오기도 했다. 디올라 종족은 포르투갈 노예무역의 첫 번째 희생자들이었다. 기니 비소는 1879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면서 식민정부에 의해 노예무역의 전초기지가 됐다. 그러나 1950년대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움직임으로 인해 독립전쟁이 시작돼 1974년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됐으며 해방 정부는 재빨리 대외적인 교역 독점을 위한 거점을 마련했다. 디올라 종족은 상업을 통해 외부 종족들과 긴밀한 접촉을 꾀해왔으며 이것은 전사, 학자 또는 상인 등으로서의 개개인의 정체성을 찾던 이들에게 자기 가치를 부여해줬다. 디올라 종족은 주요 무역 언어인 디올라Dyola(줄라 Jula)어를 사용하는데 Dyola라는 말 또한 “행상인”을 뜻한다.
삶의 모습
디올라 사람들은 족벌을 형성하며 족벌이야말로 이들의 삶에 있어 가장 주요한 일면이다. 이들은 각자의 족벌에 대한 절대 충성을 보이며 긍지를 갖고 방어하며, 춤과 이야기 등의 구전 전승을 통해 그들 족벌 역사와 헌신을 표현한다. 디올라 종족은 남녀 각각 진흙이나 시멘트로 만든 구별된 집에 살며 남자들은 원형의 집에, 여자들은 장방형의 집에 거주한다. 아버지는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아들들에게 유산을 상속하며, 가족의 남성 연장자는 권력과 영향력을 소유하게 된다. 일부다처제가 여전히 성행하며 족벌 내의 결혼을 선호하고 보통 여자들은 16세, 남자들은 18세에 결혼한다. 촌락내의 위생상태는 매우 열악해 45세 이상 성인은 디올라 전체 인구의 13%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인구의 절반가량이 15세 미만이므로 디올라 사람들은 노인, 특히 남자가 이슬람학자일 경우에 대해 특별한 존경을 표한다. 디올라 종족은 1500년대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더러는 독립된 촌락을 형성했고, 이미 형성된 촌락에 정착한 부류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특별히 구별된 지역에 거주했는데 이러한 습관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디올라diola라는 단어는 종족이나 문화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무슬림 상인을 전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수완있는 상인이나 사업가로서의 성공 외에도 이들은 가축사육과 곡물재배도 겸한다. 땅콩, 쌀은 주요 농작물이다. 어떤 디올라 사람들은 탁월한 수공예가로서 양질의 도자기나 목공제품들을 만들기도 한다. 디올라 사람들의 기본적 도덕률은 순종, 정직, 종족에 대한 헌신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규율들은 이들이 가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앙
대부분 이들은 수니 무슬림들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무슬림들이 일컫는 “이교도”들로서 전통적인 정령숭배 신앙을 따른다. 그러나 서부 아프리카 이슬람은 다른 이슬람에 비해 일반적으로 지역 전통을 인정하며, 지역 풍습의 다양성에 대해 보다 관용적이다. 이들의 종교적 신념은 기독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영원하며 전지한 창조자로서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 수호의 영들과 천사들의 존재, 성소 또는 지성소에 대한 관념, 의사소통하는 하나님의 영, 그리고 복잡한 관념을 설명하는 유추 등.
필요로 하는 것들
보건위생, 건강증진을 위한 시설들이 부족하다. 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실제적인 방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의료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소수의 디올라 개종자들이 있으나 이들의 언어로 된 기독교 자료들은 거의 없다. 이 무슬림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더 많은 사역자가 필요하며, 전도를 위한 도구들이 마련돼야 한다. 기도는 이들을 복음화 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