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은?

손기성 목사 (은혜장로교회)
손기성 목사

(은혜장로교회)

어떤 단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중 하나가 ‘행복’이란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차이도 심합니다. 신앙과 믿음의 개념을 떠나서 생각해봐도 누구는 행복이라 말하는데, 누구는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겨 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행복에 대해 고민하며 정의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막연히 ‘무탈하니 행복 아니겠는가’하는 식의 정의가 아닌 머리와 가슴으로 말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행복을 위해 감당치 못할 대가를 지불하기도하고 반복적인 후회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고국 뉴스에서 한국에 말만하면 알만한 그룹의 총수가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기자가 행복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총수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보다 누구와 먹느냐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닐까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의 이면에는 엄청난 복선이 깔려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현재 세계적으로 이혼 후 위자료와 재산분할 소송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몇 십년을 같이 살고, 자녀가 몇이 있느냐,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자신이 사랑하고 함께 식탁을 만들 사람을 만나고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의 선택이나 개념 정의가 틀렸다 맞다를 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쉽게 일어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지고 있는 것이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 회장님은 지난 과거 감옥에서 성경을 보며 은혜를 받고 출소할 때도 성경 한 권만 들고나와 세간에 이목을 집중시킨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행복으로 돌아가 봅시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이 모양과 가치와 기준이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군가의 불행이나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을 통해 내가 얻는 유익이나 감정을 행복이라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고국 방문 때 관공서와 은행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보지 못했던 문구들이 가는 곳마다 창구마다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대면하시는 직원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입니다.”라는 문구였습니다. 표현은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 같은 의미의 글들을 붙여두었습니다. 일하면서 얼마나 함부로 대했으면 이런 부탁까지 써 붙일 지경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된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주님은 친히 자신의 생각과 의미보다 이타적인 삶을 가치 있게 여기셨고, 어떤 개념에 대한 정의도 자신의 입장보다 타인을 존중하는 모습 속에서 더 크고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장의 전체적인 흐름은 자신보다 타인에게 맞춰져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좀 불편하고 모자라도 ‘함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행복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Word4u@gmail.com

09.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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