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기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나는 지금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자리에 서있다. 피렌체의 신요레(Piazza della Signore) 광장. 지금으로부터 545년 전에 용기 있는 한 사람 사보나롤라(Savonarola1452-1498)가 피를 토하듯 외치다 화형을 당한 장소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설교 할 때 피렌체 시민의 반 수 가까운 사람들이 열광했다. 보통 3만여 명이 모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설교를 하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또한 그 많은 사람들이 마음은 있었지만 그와 같은 용기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하고 싶은 말, 행동하고 싶은 몸짓, 포효, 등등 가슴 가득하지만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없어서 가슴앓이를 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인생들, 그런 사람들이 어찌 그 시대에만 있었을까? 지금도 후에도 언제나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부조리와 속임과 협잡, 이런 것이 세상의 본질이기 때문이리라.

가끔 역사물을 보면서 고개가 갸웃 거리는 경우가 있다. 당파싸움에 몰려 역적이 되고 사약을 받아야 하는 장면이다. 이 모든 것은 임금의 잘못된 정치 때문인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죽어가면서도 존중을 표한다는 점이다. 극에서 보면 돗자리를 깔고 조그마한 상이 놓이면 그 위에 사약이 올라온다. 그러면 역적으로 몰린 신하는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한 다음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극이기 때문에 미화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죽는 사람이 성인처럼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은 역적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사람의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상황을 맞은 신하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적어도 마지막 순간은 왕을 향해 임금노릇 똑바로 하라고 큰소리로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자질이 없는 사람이 왕의 자리에 앉아있음으로 나라가 힘들고 어려워졌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외침을 통하여 적어도 왕이 고민하고 자신의 정치형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지가 주어져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은 사약을 받고 아내는 관기가 되고 자녀들은 다른 신하의 종이 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잘못 때문에 조선 역사는 변화를 몰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보나롤라를 화형 당한 장소를 표시해 두었다. 그 뜨거운 화염이 사보나롤라를 휘감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군중들의 복수심에 불타는 이글거리는 눈초리를 느끼게 될 것 같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환호하고 탄성을 발했던 군중들이었는데 오늘은 야수처럼 변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고, 군중의 모습이다. 그의 피를 토하는 설교는 교황을 전율케 했다. 그는 자식을 다섯 명이나 두었으니 사보나롤라의 회개를 외치는 날카로운 회개의 설교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동원했던 교황,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추기경을 하사하겠다는 제의에 나는 빨간 모자 보다 주님의 빨간 피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소리를 높였던 그가 오늘 그리워진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놀라운 용기, 그 용기는 사라지지 않고 반세기 후에 종교 개혁자들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진리를 좇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었다.

그는 1468년 5월23일에 두 동료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그가 화형을 당하기 직전 주교는 그의 수사 옷을 벗기며 선언했다. 나는 그대를 전투적 교회(지상교회)와 승리적 교회(천상교회)로부터 분리하노라! 그때 사보나롤라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제 전투적 교회를 떠나지만 승리적 교회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를 태운 뜨거운 불이 꺼지자 그를 공격한 사람들은 그의 뼈들을 추려 피렌체 시를 관통하는 아르논 강에 던져 버렸다. 다시는 아름다운 피렌체를 요동케 하지 말라는 듯이-

사보나롤라가 화형 당한 바로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서있다. 사람은 한 점에서 태어나고 한 점에서 세상을 떠난다. 용기 있는 그가 마흔 여섯 살에 정의를 외치다 떠난 바로 그 자리! 그 자리는 침묵하고 있다. 또 다른 용기 있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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