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세상에서 용서라는 단어처럼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스데반은 잘못된 지식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온 몸이 터지고 찢겨져 마침내 새빨간 피를 강같이 흘리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면서 자신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보좌에서 일어서신 주님 앞에 놀라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오해하였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의 신실한 제자 스데반까지도 같은 죄목으로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올바른 지식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무지 때문에 일어난 범죄는 끝을 모를 정도였습니다.
요즈음에 어린 아이를 성 폭행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단회적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한 인격체가 평생을 그늘진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그런 잔인한 일을 과연 저지를 수 있을 까요? 백번 천 번 생각해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내 사랑하는 아이가 그런 일을 당하여 일생을 고통가운데 살아간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목회자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잘못을 범할 때 사정없이 돌을 던지는 사람들 중에 목회자들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보다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야 할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만이 심판의 주체로서 모든 인생들을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잘못을 범했다고 나서서 비판하고 정죄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해야 할 직분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상황에 놓였더라면 더 지독한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잘못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셨을까요? 수제자 베드로는 특별하신 주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변화산상에 올라가실 때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그를 데리고 가실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제사장의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 한 여종이 불빛에 비친 베드로를 보고 너도 저 사람과 같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생각할 것도 없이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마26;74). 그렇다면 베드로가 두려워 주님을 저주한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말일까 싶습니다. 그 때 저 앞에 포박되신 주님은 돌이켜 말없이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눅22;61). 개인적으로 이 사건은 어쩌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사건보다 덜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과거 당신을 맹서로 부인한 범죄행위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내 양을 치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그 큰 사랑에 평생을 울면서 목숨을 다해 헌신했습니다. 순교의 상황을 맞이할 때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있습니까? 나를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아주소서라고 간청하여 거꾸로 순교 당했다고 전해져옵니다. 주님의 그 큰 용서에 그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웃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