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볼자노(Bolzano)에서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이태리의 북쪽 국경 도시 볼자노(Bolzano)를 방문하던 차에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룩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색다른 음식을 먹어보려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가 주문하려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오로지 독일말만 하는 웨이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강 시켰는데 나온 것을 보니 전혀 아니었다. 맛도 형편없었고.... 이상하게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된다. 국경에서 아주 가까운 도시인데도 왜 이럴까 하는 생각에 미치자 이곳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이곳에서 가까운 이태리 도시 볼자노는 이태리 땅이면서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곳이다. 사람들의 생김새도 게르만 혈통임을 알게 되고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무뚝뚝함과 히틀러가 그렇게 우월한 족속이라고 칭했던 아리안 족의 희디흰 피부는 냉정함으로 비쳐진다. 사실 볼자노는 오스트리아 땅이었는데 1차 대전의 패전국이 되어 승자인 연합국의 직권에 의해 1918년에 이태리에 넘겨준 지역이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는 큰 나라에서 하루아침에 작은 약소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영토의 분리 원칙은 같은 족속에 대한 우선주의였지만 이곳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찍이 점령국인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방문했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었고, 그 곳에서 유고의 국수주의자 청년이 쏜 총탄에 황태자가 숨지는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기회에 손 좀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오스트리아는 고압적으로 황태자를 죽인 대가를 요청했다. 그 때 세르비아는 순순히 따르기로 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선포하고 말았다. 이에 독일은 자동 참전했고 이로 인한 전쟁이 1차 대전이었고 무려 9백만 명의 아까운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는 패전 결과 헝가리, 체코와 세르비아가 독립하여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땅의 일부는 루마니아로, 볼차노 지역은 이태리에 편입되고 말았다. 사실 이태리는 큰 공 없이 기회를 잘 잡아 이 땅들을 얻게 되었다. 하기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옛 조상 로마인들이 다스렸던 지역이기도 하겠지만.... 로마는 이 땅 뿐이 아니라 불란서와 스페인,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루마니아와 나누이기 전 유고 연방까지 점령하였으니 말이다.

연합국의 제의는 오스트리아는 앞으로 절대 독일과 병합할 수 없다는 조건이 첨부되었다. 그 결과는 인구 8백만의 작은 중립국가로 존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에 영화로움을 떨쳤던 합수브르크 왕가의 영화는 이제 먼먼 얘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이곳 출신 히틀러는 독일의 통치자가 되어 구라파를 불바다로 만들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역사를 살펴보면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떠올려 보았다. 만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유고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을 용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1차 대전이란 세계적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9백만이라는 엄청난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을 터! 또한 패전국이라는 수모와 함께 배상금을 지불해야하는 이중고를 해결하기 힘들어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출현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테고.... 그렇게 되었다면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및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고통도 없었을 것이고.

지구 촌 한 귀퉁이에서 일어나는 지엽적인 작은 사건, 그 사건으로 인해 황태자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을 당해야 했는가! 저들은 지금도 분단국이 되어 이태리에 속한 채 독일어를 사용하고 오스트리아의 향토 음식을 먹으며 산다. 분단된 지 백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한 개인이나 국가의 잘못된 자존심의 여파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싶다. 이것이 인류가 기억하는 백년 전의 참담한 역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1차 대전이라는 큰 전쟁의 상흔이 볼차노 지역의 곳곳에 지금도 남아있다. 전쟁의 야심을 버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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