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중세의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힌 사람(3)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인간은 항상 산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곤 한다. 특히 높은 산에 대한 외경심이 대단하고 그 산을 섬기기도 한다. 산은 항상 깊은 침묵으로 번잡한 인생들을 아늑한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이고 문명의 복잡함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단순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도록 교훈하고 있다.

어느 분은 말한다. 더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 낮은 곳을 버리지 말라, 산은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길이다. 작은 산이든 큰 산이든 굴곡이 있다. 인생에도 수많은 굴곡이 있는 것처럼.... 산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순간순간들이 있는데,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오르고 내려가다 보면 어느 사이 그 고비들은 극복된다. 또한 저 멀리 있는 산, 도무지 오르지 못할 것 같던 그 산들도 열심히 오르다 보면 앞이 탁 트이는 정상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정상에서 우리의 게을렀던 부분들이 승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의 ‘정언’을 듣게 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영적 거성들은 누구랄 것 없이 산을 자주 찾았다. 아예 산을 사랑하여 일생을 그 산에서 나오지 않았던 사람도 많았다. 참으로 산이란 인생에게 신비스런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로마에서 국도로 나폴리를 가기 위해서는 두 길을 이용할 수 있다. 하나는 무솔리니가 건설한 나폴리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기원전에 만든 카실리나((Casilina) 국도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원전에 닦았고 2천년의 역사가 녹아있는 국도가 훨씬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는 정감 있는 길이지 싶다. 로마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이 길을 이용하여 나폴리의 만의 카프리(Capri)섬에 있는 자신들의 별장을 부지런히 다니기도 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길에서 운명하기도 했고....

내비게이션에 카프라니카 프레네스티나(Capranica Prenestina)를 입력하고 카실리나 길을 따라가다가 왼편의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안내판을 보고 들어가 직진으로 가다보면 팔레스티리나 마을을 통과하게 되는데, 오르막길에서 왼편으로 담벼락 같은 유적을 만나게 된다. 그 유적은 로마의 5현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이다. 그리고 한참을 오르다 보면 이윽고 카프라니카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해발 1018m로 이태리의 많은 산 중에 평범한 수준이지만 이 산은 로마 시내의 동편을 평풍처럼 감싸고 있는 산이다. 로마를 방문하는 사람이나 발을 디디었던 사람들은 동편을 감싸고 있는 이 산을 한두 번쯤은 바라보았을 것이다. 정상의 바로 아래에 카프라니카 프레네스티나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는 작은 돔으로 이루어진 성당이 있고 그 성당 설계를 바티칸 돔을 설계한 브라만테가 했다고 하니 이 마을 역시 아주 오래된 마을이지 싶다. 요즈음에는 자동차로 어려움 없이 올라올 수 있지만 그 옛날에는 어떻게 이 산 정상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 까 싶다. 식량을 이곳까지 가져오려면 엄청 힘들었겠고.... 산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시 힘들지 싶다.

그 마을의 중앙에 있는 작은 로터리를 돌아 오른편으로 나 있는 길을 올라가다 보면 수려한 산길에 들어서게 된다. 그 산길, 결코 인적이 없는 호젓한 길을 한참 오르다보면 이윽고 정상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뜻밖에 작은 마을을 만나게 된다. 로마 시내가 한눈에 시원스럽게 바라보이는 곳으로 가장 높은 곳이다. 주민이 한 백여 명 정도 살고 있을까 싶다. 왜 이리 높은 산에 과연 누가 처음 거주지를 정했을까 싶다. 이곳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니 그만큼 하나님께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거기서 뒤로 난 길을 조금 내려가면 아름다운 수도원을 만나게 된다. 지형이 마치도 덧 이어낸 건축물처럼 정상의 바로 아래에 불쑥 튀어나온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아주 수려하고 경관이 일품이다. 그 수도원의 이름은 Santuario della madonna delle Mentorella이다. 이 수도원의 역사는 콘스탄틴 황제까지 거슬려 올라간다고 한다. 그 수도원의 뒷면은 거대한 바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입구가 좁아 정면으로는 안 되고 옆으로 몸을 틀고 들어갈 수 있는 굴이다. 인위적으로 뚫은 굴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성된 굴이다. 그 굴 왼편에는 네모난 철망을 만들어 이 수도원에서 수도하다가 죽은 수도사들의 해골들과 빼들을 모아놓았다. 그리고 부활을 기다린다고 고전15장의 말씀을 기록했다. 너도 언젠가는 이렇게 된다는 묵시적 교훈을 주는 것 같다.

굴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넓은 공간을 만나게 된다. 적어도 10-15명은 자리할 수 있을 정도의 넒이다. 그런데 이 굴은 의미가 있는데 즉 서방수도원의 창시자인 베네딕토(Benedictus 480-543)가 이곳에서 무려 2년 동안 머물면서 기도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되었고 이곳까지 왔을 까 싶다 일찍이 귀족 가문의 청년 베네딕토가 스무 살에 이태리 중부도시 노르차(Norcia)에서 로마에 유학을 왔다. 그때 서로마는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5-493)에게 망하고 난 뒤였다. 천년동안의 찬란한 문명이 글자도 모르는 용병대장에게 멸망을 당했으니 그 수치스러움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때였기에 젊은이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를 지향했고 쾌락이 하늘을 찔렀던 풍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네딕토는 현실에 대한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나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겠다’는 의지로 성경 하나만을 들고 로마에서 65Km 떨어진 수비아코(Subiaco) 산에 들어갔다. 그 산에 장엄한 바위가 들러있는데 그 바위중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거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기도에 전념했던 곳이 저 아래로 보인다. 베네딕토는 국가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직 이곳에서 기도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 거룩한 장소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바위굴이다. 이 바위굴은 고즈넉하게 동양에서 찾아온 길손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 선배 베네딕투스가 몸부림치며 기도했던 속살을 수줍은 듯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교훈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한 사람의 기도는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횃불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다. 끝으로 E. M. 바운즈의 기도에 대한 글을 소개하고 끝내려 한다. "옷을 만드는 것은 재단사의 일이고 구두를 수선하는 것은 구두장이의 일이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다...."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하시는지요?

chiesadirom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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