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둘째 아들을 데리고 있다. 집회가 있어 나 먼저 서울을 방문하였고 아내가 며칠 후에 들어와서 조인을 했다. 그런데 아내는 말한다. 둘째가 용돈을 주었어요. 짐짓 뭘 그런 것을 받느냐고 했지만 속으로는 대견하다고 여겨졌다. 세 살 때 로마에 왔기 때문에 무늬만 한국아이지 사고방식은 서양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동양적인 사고를 배워 엄마에게 용돈을 드린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런데 아내로부터 그 말을 듣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둘째에게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큰 빚을 지고 있다. 무려 삼십년이 지난일인데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오곤 한다. 살아가면서 후회스러운 일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사는 연약한 인생인데 유독 둘째에게 행했던 일이 가슴 저리게 편린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80년대 초에 정말 어렵게 서울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이층 건물을 임대하여 예배실을 만들고 한편을 막아 방을 꾸며 두 아이와 함께 살았다. 고생을 경험하지 않았던 아내는 개척교회의 삶을 무척이나 힘들어 했을 것이다. 가끔은 시찰회에서 쌀을 공급하기도 했고 또한 노회에서 얼마간 도와주기도 했다. 교회에 성도가 적었기 때문에 힘들게 지내야 했다. 그런 어느 날 당시 서너 살 되는 둘째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당시 둘이었는데 큰 애는 아빠가 거절하면 금방 체념하는 스타일이었으나 둘째는 그렇지 않고 끈질긴 면이 있는 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안 된다고 했는데 막무가내로 울면서 떼를 썼다.
사실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스크림 하나 사 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안 된다고 거절하는데도 듣지 않고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를 향해 이상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라기보다 나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척한 동료들은 잘하고 있는데 정작 잘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나는 목회가 되지 않았다. 거기서 오는 열등의식과 자기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복잡한 마음이 둘째아이의 막무가내 식 고집을 통하여 활화산처럼 분출하였다. 그래서 그 작고 여린 아이를 사정없이 때렸다. 마침 아내도 없었기에 버릇을 고치기에 적당하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그 작은 아이가 아빠의 놀라운 변신 앞에 놀라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는다고 비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훈계를 위한 매가 아니라 엄연한 폭력이요, 잔인한 분노의 표출이었고 나 자신을 향한 성냄이었다. 그리고 헐떡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때리기를 멈추자 즉시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런데도 아이가 자라도록 한 번도 그 때 일을 떠올리며 용서를 빌지 않았다. 물론 주님을 향해서는 회개하였지만.
그래서 어느 날 아빠가 네게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 때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나 뭘요, 라고 천연덕스레 대답한다. 그 아이가 성장하여 지금은 로마에서 가장 큰 호텔의 총 지배인이 되었다. 수백 명의 이태리 사람들을 다루는 일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셨다. 아마도 전통적으로 백인의 우월 문화로 팽배한 구라파에서 이런 일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가 출근하기 위해 말끔한 옷을 입고 나가는 뒷태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아들아, 그 때 일은 정말 미안했다. 용서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