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와 종말현상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현상들이 곳곳에 나타나면서 다가올 미래가 아닌 ‘다가온 미래’시대를 이미 살아가고 있음을 본다. 구약성경에 전염병은 패역한 세대에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들 가운데 한 현상이었다. 신약성경은 기근과 지진 그리고 전염병이 있을 것인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진다고 말한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전염병이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이것이 어느 한 곳에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여러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가 횡행하는 현상들이 많은 부분 이러한 조건에 일치됨을 목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코로나 전염병이 교회가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종말현상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모이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목회적으로 특별한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무엇이든 성도가 어려움을 만나면 교회를 찾아와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이 염병은 교회로 모이는 자체를 금지하고, 여기에 공권력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면 과연 말세지말의 현상임을 직감하게 한다. 성경은 분명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고 말한다.
종말의 때에는 사랑도 식어질 것이기에 더욱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 코이노니아의 풍성함을 드러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세상은 이 말씀의 명령들과 역주행하며, 오히려 목회자와 성도들 가운데에도 스스로 ‘모이지 말자’라고 강조하며 마치 사회적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다. 어느 주지사는 찬송을 부르지 말라고 행정명령을 내린 후에 고소가 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교회 안에까지 구청직원이 들어와서 설교자에게 마스크를 쓰도록 강제하며 예배를 감시한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 종말현상 가운데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뉴노멀, 언택트, 비대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시대를 표현하는 용어가 생겼다. 뉴노멀(New-Normal)의 시대라고 한다. 일상의 삶과 반대가 되어 정상적이라고 하기에는 합당치 않아서 새로운 노멀, 뉴노멀시대의 등장을 말한다. 두 번째는 언택트(Un-tact)시대이다. 영어에 없는 단어인데 contact에 임의 부정어를 붙인 조어이다. 세 번째는 상호 실제 얼굴을 보고 대할 수 없는 비대면 공동체로의 전환을 말한다.
실제 이와 같은 신조어가 생길만한 상황들이 선명하게 보여진다. 식당은 이제 테이크아웃 전문점으로 변화된지 오래다. 집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데, 단 2인분의 경우에도 주문배달에 응하는 것을 본다. 이유인즉, 지금 2인분이 후에 20인분도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리 단골확보를 위한 과용의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학교도 지난 3월부터 아이들이 온라인으로 전환해서 시험과 모든 과제를 수행한다. 심지어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전혀 학교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면 팝콘에 콜라를 마시면서 함께 놀라고 함께 웃는 낭만도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극장에 갈 필요도 없게 되었다. 가정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가 배포되고 클릭 클릭만 하면 편안한 자세로 집안에서 영화를 즐기게 되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를 파악한 빅 데이터가 좋아할 영상을 계속 추천해 보내온다. 이제는 더 이상 어딘가를 가지 않고 계속해서 방콕 집콕이 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빅 데이터와 이상한 세상
여기에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 빅 데이터이다. 유튜브를 시청할 때도, 자동 재생기능에 의해서 내가 가진 기호를 파악한 빅 테이터가 계속 유관된 영상물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최근에 셔츠를 하나 구입했는데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 교환하러 가게를 방문했다. 영수증이나 기타 정보를 위한 이메일을 남기기 원해서 주었더니, 계속 광고 메시지를 보내온다. 그런데, 이제는 메시지 뿐 아니라 인터넷을 켜면 광고판에 관련광고까지 떠오른다. 엄청난 유혹이다. 결국 넥타이에 유혹이 되어서 선택한 후 바구니에만 넣어두고 다른 일을 하던 중에 또 메시지가 날아왔다. 결제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도와주고 싶다는 메시지였다. 대신 돈 대줄 것도 아니면서 왜 묻느냐고 한마디 하면서, 동시에 많이 놀랐다. 얘가 도대체 뭔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는 빅 데이터란 존재가 내 생각과 기호를 읽고 보고 있다는 생각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는 서점에도 갈 필요가 없다. 책을 사지 않고 가정에서 그냥 아이패드를 들고 e-book을 읽거나 대신 읽어주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차량도 운전을 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 기업들도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기계나 시스템들이 홀로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기술로 발전해서, 예전처럼 회사 취직하면 할아버지가 양복 사주며 축하를 하고,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빌딩크기를 자랑삼아 말할 필요가 없는 재택근무, 무출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제는 방안에서 태어나서, 방안에서 지내다가, 방안에서 죽게 되는, 그런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다가온 미래와 준비
위에 약술한 내용들은 항상 다가올 시대의 이야기 소재였었다. 그런데 금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변화의 가속도가 붙어서 이미 다가온 미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준비하는 기업들만 살아남는다고 미래시대를 대비하자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 준비해야 한다. 매장 크기와 숫자만을 자랑하던 월마트처럼 해서는 곤란하다. 아마존의 급성장을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하고, 비둘기의 순결함을 뱀의 지혜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꾸준한 질문들 속에서 반드시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과 교회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인 교회공동체는 어떻게 이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 속에 제대로 반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요동치는 세상가운데서 교회는 불변한 진리를 잘 파수하며 나아가야 한다. 진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복잡해도, 답은 간단명료하다. 바이블이 뭐라고 하는지 그렇게 하면 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세상의 삶에 홀로족(族)들이 등장하고, 이것이 익숙해지고 편안하여지고, 편한 것이 좋은 것인 줄 오해가 되어 계속해서 비대면 비접촉 사회가 형성이 된다 할지라도,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그 모습을 지켜야 한다.
기독교영성, 개인주의와 양립불가
세상은 점점 인간이 혼자 있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교회는 그럴수록 더 모이는 대면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 때 혼자 있기에 좋은 존재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문화는 창조의 원리와 맞지 않다.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만들고 가정을 이루게 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즉 함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혼자 있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의 영성은 개인주의와 양립될 수 없다. 생각을 해보라. 말씀이 충만하고 예배에 큰 은혜를 받아서 성령으로 충만하여진 사람이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잠시는 몰라도 참 신앙의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성경을 보라. 오순절의 성령의 충만했던 사람들 그들은 함께 교회를 세웠고, 저들은 입을 열어 세상 열방의 영혼들을 향해 복음의 나팔을 불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면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영혼들을 향해 나아가고, 주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함께 예배하게 된다.
혼자 있던 하와가 사단이 꾀어서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마귀가 딱 좋아하는 시간이다. 다윗이 홀로 있을 때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이 만들어졌다. 가룟유다가 무리에서 이탈되어 혼자 대제사장을 만나러 다니면서 주님을 십자가에 넘기는 죄를 범했다. 도마가 예수님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 보지 않고도 믿는 복된 믿음을 가지도록 책망을 받았다. 예수님이 혼자 계셨을 때, 예수님마저 공격하는 간 큰 사단을 보면서 우리들도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사단이 표적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때 혼자 있지 않고 만나서 이야기할 사람과 상대가 있어야 한다. 쉽게 뛰어내리거나 자해하지 않을 희망이 있게 된다. 사업도 물어볼 사람이 있는 사람은 망해도 크게 망하지 않음을 본다.
교회의 새로운 부흥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목적에 맞게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향한 갈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모양 저 모양 친목 모임으로 시작해서 향우회나 전우회, 학우회 등등의 무리 짓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생의 본질과 전혀 다르게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비대면화가 너무 가속화된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의 중심에 바로 교회가 있다. 예배가 있다.
혹자는 코로나 이후에 혼자 있는 습관들이 익숙해진 탓에 기독교가 위축될 것이며 교회는 힘들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일견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본질만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코로나 이후에 제2의 예배회복과 새로운 교회의 부흥기가 올 것이라고 여겨진다. 포스트코로나 이후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찾는 곳이 교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어놓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코로나가 삶의 지형을 바꾸어 버렸다. 잠시 격리하듯 홀로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본성은 그 체질을 따라 사람이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 한다. 실제 외롭다. 그러나 이러한 시절에는 오라는 데가 없다. 학교, 직장, 식당 등 어느 곳이든지 사람이 그리운데 오라는 곳이 없고, 가급적 오지 않기를 원한다. 함께 밥먹어줄 사람도 잘 없다. 그런데 그런 때에 나를 반겨주고, 사랑으로 섬겨주고, 함께 찬송하며, 함께 성경공부하고, 힘들면 위로하고,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내가 섬기는 이 로컬처치라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에 합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그 교회위에 우리 하나님은 코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부흥의 은혜를 허락해주실 것이다.
준비된 교회, 노아의 방주
인생은 편한 것으로만 살수 없는,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의 교회가 주님 앞에 합당하게 준비만 되어진다면, 교회는 사막 광야 같은 외로운 인생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코이노니아를 회복함으로 반드시 제2의 부흥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오고 싶은 곳, 찾고 싶은 곳, 매력적인 곳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진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바꾸는 변화의 과정과 노력만 있으면 포스트코로나를 지나면서 결코 기독교와 교회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모두, 흩어져서, 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과 점점 멀어져가고 교회도 쇠하여 문을 닫는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택한 백성들은 교회 없이 어디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할 노아의 방주를 찾겠는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무리 창궐하여도 코로나 염병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와 몸 된 교회를 위해 더욱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으시면서 더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8.0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