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가시는 길에, 주님이 계시는 곳에

-세상의 한계, 온전한 회복-
전남수 목사

자연계시의 한계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곳은 신비로운 치유의 장소로 소문이 나 있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연못에 먼저 들어가는 이들에게는 치료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믿고 수많은 각색 병 환자들이 연못가에서 그때를 기다리며 매일 매일이 아우성이다. 

성경에 무슨 이런 어릴 적 동화책 같은 이야기가 있을까? ‘깊은 산속 연못에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산신령 할아버지’ 같은 이야기가 가능한가? 가능한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가운데 ‘자연계시’라는 영역이 있다. 인근 핫스프링의 좋은 유황온천물에 들어가면 믿음에 상관없이 치료의 효과가 나타남을 많은 사람들이 증거 한다. 그래서 병원이 많지 않던 예전에는 온천지역 근처에 물리치료소 같은 시설들이 있어서 팔과 다리를 잘 못쓰던 사람들이 꾸준히 치료를 받아 완치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에 관계없이 일반은총의 빛을 따라 열심을 가진 이들을 이렇게 도우신다. 깊은 산 곳곳마다 산삼도 심어주시고, 용한 약초뿌리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인생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신묘막측한 모습의 한 부분이시다.

양문 곁 베데스다는 더 이상 세상의술에 기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유레카 기적의 장소이다. 기쁨의 감격과 소망이 예비된 축복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당연히 그곳은 잔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기적의 감격이 존재하지만 엄연히 세상에 속한 기적이라는 한계 속에 주님이 드러내신 많은 기적과는 차이가 있다. 세상이 주는 기적은 극히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으며 세상의 질서 안에 부속된다. 물에 먼저 들어가면 낫는다고 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다른 환자들보다 좀 더 힘 있는 사람, 주변의 도움이 있어서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아니면 눈치라도 빠른 사람이 혜택을 먼저 누리게 되는 그런 곳이다. 

저들이 모인 곳은 각색 병자들 간의 경쟁과 원망 소외가 드러나는데, 이것은 죄성을 극복하는 믿음이 부재한 자연계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힘센 사람, 돈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연약한 사람은 차별과 경쟁에서 밀려난다. 베데스다 연못가는 평소에는 사이가 좋다가도, 물이 동하는 이익이 부모형제라도 밟고 지나가는 경쟁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움직이고 궁극적인 선을 향해 나아가지만, 매 순간 숨이 막힐 듯이 불의하고 공평하지 못한 것을 목격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원망과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갈 따름이다. 참되고 아름다우며 영원한 것이 없다.

 

원망과 상처

 

예수님은 그들 각색 병든 자들 중 발병한지 38년된 병자를 주목하고 찾아가셔서 초점을 맞춘다. 수많은 병자들 가운데 그 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관심은 늘 한 영혼이다. 한 사람의 영혼에만 관심을 가지시는 편애를 말함이 아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세상에 오직 한 영혼만 존재하는 것처럼 유일무이한 관심을 주시며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먼저 찾아오심으로, 만남의 기적 치유의 역사가 시작된다. 드디어 주님이 물으신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나 38년된 병자의 대답은 모두가 기대하던 답을 내어 놓지 않는다. 입술로는 ‘주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들은 원망과 불평이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 주변사람들을 원망한다. 같이 행각에 모여 평소 말동무라도 하며 서로 의지가 되어왔던 이웃 사람들마저 원망한다. 

사람의 말에는 그의 마음에 품은 것들이 드러난다. 영적상태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그의 품격과 존귀함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아무리 감사한 좋은 일을 만나도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이 부정적이다. 축하의 말을 들어도 무심하고 시큰둥하게 답을 한다. 축하의 말을 건네던 사람마저 무안해질 정도로 상대하는 것을 본다. 그런 사람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누가 보아도 그 삶이 어렵고 힘들 것임에도 늘 밝고 긍정적이며 믿음과 소망의 말을 하는 것을 본다. 누구나가 그를 좋아하고 함께 하기를 원한다. 

무엇의 문제인가? 그 마음을 지킬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무너져 내린 그 마음의 상처가운데, 원망의 말과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을 쏟아내어 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 결국 그가 가진 믿음의 영적상태를 설명한다. 다윗을 보라. 광야의 억울하고 힘든 형편들 속에서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찬송과 감사의 시가 흘러나왔다. 그가 고통 중에도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그 마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입술의 열매가 그 자신의 영적상태, 영혼의 존귀함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마음의 병과 믿음

 

38년간 앓아온 육체의 질병들이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마침내 속 깊은 마음의 병증인 원망과 불평이 지배하는 심령이 되도록 사단이 역사하는 것을 본다. 베데스다와 비교할 수 없는, 참 회복자이신 주님 앞에서도 남을 탓하며 원망을 쏟아내는 그를 보면서 영육 간에 심한 중증임을 확인하게 된다. 

질병의 고통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한편으론 사단의 역사가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과연 38년된 병자는 원망과 불평밖에는 할 게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38년이라는 긴 세월의 질병에도 생명을 부지하였고, 나음에 대한 소망의 싹을 지워버리지 아니하고 지금도 그 기대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지 않겠는가? 

38년의 긴 투병을 혼자의 힘으로 감당해왔을까?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은 긴병에 돕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었을지라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38년이 증명하지 않는가? 더불어 물이 동하기까지 함께 질병의 고통을 나누던 환우들도, 그의 원망의 말을 듣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동병상련의 아픔들을 가진 이들이 아니겠는가?

그의 입술의 원망과 불평은 결국 그의 믿음 없음과 삶의 고난으로 폭격된 속사람의 영적상태를 설명한다. 그는 입술의 말로, 주변과 이웃을 원망함으로 스스로의 품격을 전락시켜버렸다. 믿음의 부재가 말과 자신의 삶을 흐트러뜨림을 확인한다. 인생의 존귀함은 아름답고 복된 믿음에서 시작된다. 주를 향한 온전한 믿음이 속사람을 바꾸어 주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원망과 불평이 아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실현한다. 원망과 불평은 영혼의 독버섯과 같다. 사람의 존귀한 영혼이 독버섯과 함께 성장과 삶의 회복과 신앙의 향기를 나타낼 수 없다. 

 

주님과의 만남

 

믿음 안에서 영혼의 변화, 속사람의 변화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대충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그렇게 좋은 예수를, 그렇게 오래 동안 믿고도 왜 변화가 없는가? 제대로 만나지 못하니,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어도 변화를 맛보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38년된 병자는 주님을 눈앞에 두고 ‘주여’라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도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을 다 덮어주시고 치료해주시는 한없는 크신 사랑이었다. 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있는 것이 일상이었고, 병이 너무나 오래되어 전혀 가망이 없는 그를, 사람에 대해 원망과 분노만 가득했던 그를, 주님은 사랑의 손길로 덮어주셨다. 일어나 스스로 그 짐을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완전히 고쳐주셨다. 엄청난 특혜를 입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와 같다. 우리 쪽에서 전혀 공로를 찾을 수 없는, 죄인 되어 악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던 그런 나를 찾아와 주셔서, 상처난 마음들을 어루만지시면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아닌가. 도저히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없는 영육간 금치산자와 같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자신의 짐을 들고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이 아닌가.

 

온전한 변화

 

그러나 그렇게 주님을 만났지만 38년된 병자는 고통의 깊이만큼 쉽게 변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찾아와 짐을 들고 걸어가는 율법조항의 위법한 일을 지적받았을 때, 그는 책임을 예수님께로 돌리는 것을 본다. 더불어 자신을 낫게 한 그이가 누구인지 말하지 못한다. 그 마음이 아직 믿음으로 정리정돈 되지 못한 모습이다. 입술로는 ‘주여’라고 부르며,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지만 삶에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병이 나은 후 유대인 남자들이 당연히 지킬 유월절 규례를 위해 성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거기서 그는 예수를 다시 만났다. 성전에서 주님은 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육신의 질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영혼의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육신의 나음을 넘어서는 구원받은 영혼으로서 삶의 온전한 변화를 드러낸다. 유대인들이 그를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가 유대인들에게 스스로 찾아가서 자신을 낫게 한 이가 예수라고 담대히 전하는 것을 본다. 제대로 예수를 만난 것이다. 

 

과연 가능한가?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성전에 나아가지 않아도, 교회생활과 봉사생활을 하지 않아도, 신학이론으로 볼 때는 천국 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제대로 예수를 만나면 그렇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살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부부가 서로의 안부를 정중히 여쭈기만 할 뿐 삶의 교제가 없다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주를 위해 목숨을 내어 드릴지언정 담배는 못 끊겠노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망언에 불과하다. 이름 뒤에 붙은 ‘목사 장로 권사 등’ 좋은 타이틀을 다 가졌는데, 삶은 왜 변하지 않는 것일까?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흉내 내는 신앙, 처세술로 주님과 교회를 섬기기 때문은 아닐까? 제대로 주님을 만나면, 비록 어느 정도의 양육과정은 필요로 하겠지만, 결코 몇십년 예수를 믿었다 하면서도 세상 사람과 동일한 음담패설과 입술에 원망과 불평을 가득 채운 채로 그렇게 살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 주님의 집

 

주님을 제대로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무엇보다, 주님이 가시는 길 그곳에 나를 가져다두어야 한다. 주님이 머무시는 집에 나도 함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유대인의 규례를 따라 명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으로 가시던 길에 병자를 만난 것이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 그가 있었기에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병의 치유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그가 주님을 만난 곳이 어디인가? 병이 나은 그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방문한 성전에서 다시 주님을 제대로 만났다. 

우리는 어디서 주님을 만나는가? 주님은 상천하지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시기에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이런 범신론적인 사고로서는 평생 만나기 어렵다.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이 가시는 길, 주님이 정해두신 길, 주님이 머무시는 곳,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곳, 주의 집, 주의 교회, 주의 성전, 주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한번 만나서 되지 않고, 주님을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면서, 삶의 참된 변화와 회복의 기쁨과 감격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코로나 위기 속에 더욱 이 숫자는 증가하게 될 것이고, 이를 뒷받침할만한 싸구려 복음과 세속 목자들의 나팔소리가 더욱 울려 퍼질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만날 다른 길은 없다. 다시금 교회는 최고의 방역 속에 최선의 예배드림을 통해 인생의 회복을 맛보는 기적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베데스다에만 머물면 안 된다. 주님이 예비하신 주님의 집, 성전에 머물러야 한다. 

davidnjeon@yahoo.com

07.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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