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평범한 기초

-가정, 조국, 교회
전남수 목사

작고 평범한 것

한때 뉴욕의 지하철은 범죄의 온상이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뉴욕을 방문하게 되면 지하철을 타지마라는 조언을 많이 들어야 했다. 그러던 것이 1994년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이 대책을 내어놓으면서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지하철역과 지하철 안에 빼곡히 쌓여있는 낙서를 지우는 것이 대책이었다. 

시민들이 많이 황당해하고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 범죄를 줄이려면 예산을 늘려서 공권력을 강화하든지 그렇게 해야 하는데, 이게 웬일이냐는 반응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5년 동안의 낙서를 지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하철범죄의 75%가 감소했다고 한다. 모두가 그 결과에 놀라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작고 평범한 원인을 제거하면, 크고 특별한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원리에서 그 일이 시작되었고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사실 아무도 낙서가 심각한 큰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강취하는 무력이 행사되는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관용한 편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공공장소의 낙서를 지움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작지만 잘못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함으로, 그것보다 더 큰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큰 범죄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초와 기본

 

작고 평범해 보이는 일들이 무엇인가? 눈에 화려하게 보이지 않아도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건물에 비유하자면 보이지 않아도 중요한 것은 ‘기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기본’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건물에 있어서 그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내부 인테리어의 화려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 백화점 내에는 수많은 화려한 제품들이 즐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밑둥치 기초가 무너지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생명마저 담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건물에 기초가 중요하듯 사람에게는 ‘기본 혹은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다. 

군대에서 제일 중요한 기본기는 제식훈련이다. 제식훈련이 되어야 총도 주고, 탱크도 그 비싼 비행기까지 맡기게 된다. 야구선수도 좋은 타자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도 작은 기본기이다. 비전문가가 보아도 한 가지만 보면 알 수 있다. 스윙할 때 팔꿈치를 붙이느냐 떼느냐를 보면 기본을 잘 갖추었는지를 분별하게 된다.

 

기본기를 갖춘 가정

 

기본이 갖추어져 있으면 인생에 기대할 만한 미래가 있고 힘과 능력이 있음을 본다. 어릴 때 시골 할머니 집에서 자라던 때가 생각난다. 여러 인척 가정들이 기와집에 큰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독 어른들은 저 웃마루 가난한 집을 보고 배우라고 어린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셨다. 그 집은 여전히 슬레이트 지붕에 아주 작고 가난해 보이는 집이었다. 어른들의 말씀은 저 집은 아들이 육사(육군사관학교)를 갔다는 것이다. 70년대 초에 육사를 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고, 방학이 되어 제복을 입고 고향을 찾아오게 되면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무도 그 집을 가난하다고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기본이 갖추어진 가정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집안이 비록 가난했지만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서 바르게 잘 자랐고, 어릴 때부터 아침 점심 저녁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부터가 달랐다는 것이다. 기본이 잘 갖추어지면 사람들에게 무시 받지 않는다. 현재의 모습만이 아니라 미래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학교를 가는 데, 양말을 신었는지, 운동화의 끈은 제대로 매었는지, 벨트는 착용을 했는지, 머리는 제대로 단정하게 빗었는지, 이러한 작은 것들에도 부모의 지도를 받으며 학교를 가는 아이가 있다. 반면에 엄마나 아이나 아침 늦도록 잠에 빠져 있다가 겨우 학교 갈 시간에 임박해 일어나, 화장실 가던 복장으로 슬리퍼를 끌며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등교하는 아이도 있다. 

두 아이의 수업의 자세와 성취도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함과 부함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것만을 누리는 여유로운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깨끗하고 정갈하게 준비하고 갖출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돈으로 치장하고 꾸밀 수 없는 사람의 기본기의 문제이다. 

 

기초가 튼튼한 나라

 

개인과 가정, 가문뿐이겠는가? 기초와 기본이 튼튼하지 않으면 나라와 국민도 온전하지 못하다. 지금의 조국 대한민국을 보노라면 정말 희한한 세상의 일들이 난무하는 것을 본다. 나라의 기본은 법치일 터인데, 법 해석과 적용을 고무줄 당기는 것처럼 하며 나라의 기초를 허무는 인치를 전횡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외양의 이벤트들만 강조하다 보면, 오래지 않아 페스티벌이 끝난 공원의 허전함 같은 공허한 후회만을 가져올 것이다. 국가가 역사를 해석하고 판단하며, 짧은 임기의 5년짜리 정권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만 껌뻑이며 기둥뿌리 하나만 뽑아 놓아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말 것이다. 

비리 수법이 막장 수준이라고 지목받는 전 청와대 관리가 국회 고위직에 이어 광역시 부시장으로 연이어 영전하도록 자기편 관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경찰공무원은 대통령의 친구를 시장에 당선시키기 위해 민변 변호사조차 범죄 유형이 3·15 부정선거에 가깝다는 선거 공작을 자행했는데도, 국회의원이 됐다. 

변호사 시절 범죄 혐의를 받음에도 의원이 된 자에게 대통령이 직접 축하 전화를 하고, 스스로를 개혁자로 칭하는 것을 본다. 어떤 여성의원은 자신의 과거 법관 시절 업무능력을 낮게 평가한 것을 상대방에 대한 탄핵의 사유로 꼽는다. 저들이 국가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이다. 

머나먼 타향에서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현충원에 모시면 파묘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더불어 북한이 요구하는 대북 선전물을 금지하도록, 군대를 동원해서 막겠다고 한다. 

군대가 무엇인가? 적을 막아내는 역할을 해야 할 군대를, 오히려 적의 요구를 들어서 같은 편을 가로막겠다는 것이다. 피아구별을 할 수 있을까? 평화를 원하고 통일을 원한다면 군대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강한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관용과 화해와 자유통일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세계사에서 전쟁이 끝난 후 군대를 계속해서 강군으로 이끈 나라들만이 온전한 평화를 이끌어온 것을 본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군의 자존감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북한이 원하는 대로 군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과연 늘 하나님 앞에 기도로 올려드린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란 말인가? 마음에 분노와 충격을 금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100세의 노 장군은 가족들을 통해 말한다. 자신은 어느 곳에 묻혀도 상관이 없다고, 자신의 생명과 삶을 조국에 드린 것으로 감사하고, 이것이 정치권과 연결되어 분열의 단초가 되는 것을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참 군인이고, 참으로 조국을 사랑하는 본심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무너진 나라, 서러운 백성

 

2년 전 폴란드를 방문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유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바르샤바의 역사적인 ‘게토’를 방문했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독일군은 수백만의 유태인들을 마을이나 도시의 지정된 구역으로 몰아넣으면서 유태인 인구를 통제할 목적으로 정한 곳이다. 그곳은 자유가 없다. 마치 토굴 같은 흙구덩이를 파서 호롱불을 켜고 흙더미 속에 생활거주지를 세운 모습들이었다. 

나치는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낙후된 구역을 그렇게 게토로 지정하고 철조망 울타리나 벽을 세우고 그 입구는 경찰과 독일 군대가 지키면서 통행의 자유까지 금지하며 유태인들을 핍박했던 참으로 고통스런 장면들의 전시장이었다. 한마디로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그냥 토굴의 미로를 따라가는 동굴속 박쥐의 서식지 같은 느낌이었다. 나치가 사람취급을 안한 것이다. 

무너진 나라의 백성들이 당하게 될 서러움들이 눈에 선하게 느껴졌다. 북한도 마찬가지 아닌가? 일제 35년 분단 70년 105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고통 중에 절망하는 저들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채 주체를 외치지만 아무것도 주체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자유 대한민국도 그 기초가 무너지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치 못할 어려움으로 찾아오게 될 것이다. 세계 10위에 가늠하는 경제대국의 위엄도, 염치없는 인치에 의해 나라의 기초가 무너져 내리는 그날에 참담한 현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욱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교회의 기초

 

기초와 기본이 든든한 개인과 가정과 나라는 미래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기초와 기본의 질서가 분명한 교회위에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세상의 일이 그러하다면 영적 생활은 더욱 그렇다. 작고 평범해 보이지만 교회를 움직이는 말씀과 성령의 기초, 은혜의 기초위에 세워진 성도들이 혼돈된 전염병의 시대에도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을 본다. 저들이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는 귀중한 잣대이다. 

전염병이든 어떤 광풍이 몰아쳐도 흔들림 없이 꾸준히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 평소 저들이 가진 기본적인 신앙,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신앙기초의 파워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의 시대를 맞이해서 교회마다 기초를 강화하기보다는 화려한 한 칸 카메라모니터에 많은 것을 의지한다. 예전에 어떤 아나운서가 방송시간에 맞춰 깨지를 못해 아래 잠옷 바지에 상의만 양복을 걸치고 방송을 깜쪽 같이 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시청자를 속였다기보다는 임기응변이 통한 재미있는 방송일화가 된다. 

그런데 만일 설교자가 그러하다면 어떤가? 물론 급한 상황이면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한 회개의 제목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카메라에 잡히는 보여지는 부분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현재의 여러 상황들을 볼 때 갈수록 영상이 강조되는 시기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영상으로 송출가능한 부분만 잘 제작하면 나머지는 어떠해도 상관이 없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눈가림 식의 교회사역들이 일반화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된다. 

결국 보이지 않지만 교회의 진정한 기초가 되는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사상들은 강조되지 않고 그저 눈에 보이는 이벤트식의 행사와 좋은 영상장비, PD를 능가하는 방송제작 기술자만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강단의 존귀함이 아니라 화려한 빛의 영상이 만들어지는 무대만 찾게 되면. 또 이것에 경도되어 사람들이 모이면, 이것을 교회의 부흥이라고 오해하게 된다면 정말 교회는 미래가 없다. 

최근 메일로 발송되어 오는 교회 광고물들을 보면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이끄는 유혹이 크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기초 없이 건물을 올리는 것 같아서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환란의 시대와 영적 기본기 

 

건물의 기초, 사람의 기본기, 교회와 국가의 기초에 대해 짧은 생각을 적어보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더 작고 평범한 것을 강조해야 함을 생각해본다. 강하고 좋은 군인은 기본기가 튼튼한 군인이다. 어려운 때 성도들의 영적 바닥이 보여질 때마다 목회자로서 고통스러운 마음을 가진다. 

우주여행이 곧 다가올 것처럼 빠른 세상의 일들 앞에서 성도들에게 단순하고 중요한 영적기본기를 더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더욱 결심한다. 신앙생활의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고, 험한 세상가운데서 나와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지키는 것임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다.

davidnjeon@yahoo.com

 

06.13.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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