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사울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슬픈 조가를 불렀다. 사울과 요나단은 아름다운 사람들이며 백성들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비싼 장신구를 채워 줄 정도로 백성들을 잘 돌보았다고 노래한다. 요나단은 몰라도 사울까지 그렇게 다윗이 슬픈 조가를 불러줄 필요는 없었다. 의로운 친구였던 요나단에 비해, 정작 사울은 한마디로 다윗에게는 원수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전쟁에 나가서 최선을 다해 승리하고 돌아왔음에도, 당연히 환영하고 축복해야 마땅할 왕이요 장인이었던 사울은 오히려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지 않았던가. 죽을죄를 지은 것이 아님에도 살기위해 광야를 짐승처럼 숨어 다니고 미친 척 연기도 해야 했던 그런 기막힌 사연을 제공한 자가 사울이었는데, 어떻게 그를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사울은 다윗 개인에 대한 잘못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은혜를 잊어버린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가장 약한 베냐민지파 출신이다. 게다가 가난하고 약한 기스 집안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왕이 되었다면 한마디로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한결같이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은혜 베푸신 하나님보다 자기 머리에 쓴 왕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교만에 빠졌다. 하나님 없이 자기 힘으로 왕관을 지켜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결국에는 예배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버렸고,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충성스런 다윗을 죽이는 데만 모든 힘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순간에도
그런 악한 사울이 죽었음에도 다윗은 축가가 아닌 슬픈 노래를 부른다. 상식적으로 기대했던 당연한 행동을 벗어난 의외의 행동을 통해,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그럴 때 참 짧은 순감임에도 평소 준비된 그의 사람 됨됨이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콘테스트에서 우승한 후 모든 이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공적과 자랑을 뒤로하고, 그 짧은 순간 모든 시간을 스탑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조근조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정말 영적으로 잘 훈련되고 준비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즉흥적으로 연기를 한다고 되지 않는다. 삶의 반향인 것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슬픈 조가를 부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엔게디 굴에서 그의 옷자락을 베고 마음에 아픔을 느낀 것처럼, 그의 죽음 앞에 마음을 내려놓고 애통하며 저들의 공적을 백성들에게 전하기에 열심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쓰시는 사람의 모습이다.
다윗의 삶과 신앙의 인격은 양을 치는 초원에서든, 사울에게 쫓기던 광야에서나, 왕의 모습으로 권세를 가졌을 때나, 혹여 자신이 범죄했을 때라도 늘 하나님 앞에서 한결같다. 한결같이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 하나님의 원하시는 모습대로 마음과 행위와 말을 드러내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남의 잘 안되면 위로는 하지만 자신이 그 입장이 안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쉰다. 그러나 다윗은 남다른 사람이다. 그는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죽음과 실패를 슬퍼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삶을 경영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야지, 남이 잘 안 된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복 없는 인생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마음, 주님처럼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다윗의 마음은 곧 주님의 마음이다. 예수님의 삶에도 자신을 위한 사사로운 것이 없었다. 아무리 급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죄인의 자리에 있던 이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자신이 보살피고 돌아보아야 할 연약한 사람의 일들을 잊지 않으셨다. 주님의 이 마음이 그의 인생에 확장될 때, 그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생각하고 보살피고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마음에 합하여 지도자가 되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인물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헌신이 요구될 때 헌신하지 않는 것은 자신만의 결정에서 끝날 무심한 일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쓰시지 못하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자신의 일이 아닐지라도 이웃의 고통을 헤아리고 함께 품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귀하게 보시고 쓰시는 것이다. 일반은총 안에서도 당연히 그러하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는 너무나 명확한 것이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 가택연금으로 십수년을 고통가운데 지나고 있었다. 그렇게 집안에 갇혀있어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담장을 넘어서 백성들에게 전해졌다. 그 말이 무슨 말인가? 자기 몸 하나 잘 돌보기 어려운 때에도 늘 끊임없이 백성들을 생각하는 말들과 관심을 드러내더라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그가 관심과 배려를 나누었던 그 백성들의 지도자로 복권이 되었다. 역시 지도자감은 평소의 준비된 말과 행동을 통해 충분히 증명이 되는 것이다.
자기애와 헌신
그러므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생각 자기가정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나만 살고 보자는 사람, 내가 싫으면 안하겠다는 사람. 내가 좋으면 다른 사람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 한마디로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가 신앙인이면 하나님께서 그를 귀히 쓰시지 않는다.
왜 그런가? 헌신이라는 단어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가 헌신할 수 있는가? 끊임없이 남을 보호하고 배려하며 보살피는 사람이다. 그는 마침내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신경 쓰면 머리가 아플 것이고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그런 문제에 직면함에 있어서 회피하지 않는다. 머리가 아프고 복잡한 상태를 경험하는 일임에도, 놀라지 않고 그러한 일과 내용들이 몸에 익숙한 듯 받아들이고 행동하더라는 것이다. 헌신과 배려의 훈련이 잘된 증거이며, 이런 사람이 참된 지도자이다.
성경은 자기만 생각하는 삶을 배격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계신 것인데, 어떻게 나만 생각할 수 있겠느냐? 결코 자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성도라고 하는 이름만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된다. 성도라고 하면서 어떻게 자기 기분, 자기 몸뚱아리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식이라고 하면서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고, 모든 관계를 다 잘라버리고, 자기 가정밖에 모르고 산다면 과연 그는 어떤 인생이 될 것인가? 홀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의 낙을 누리는 복 있는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결국 부모도 자식도 가정도 돌보지 못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헌신과 배려로 그들을 섬길 수 있는 위치를 내어버림으로 스스로 그들을 향한 리더십의 복을 던져버린 것이다. 섬기는 만큼 섬김의 능력이 제공하는 리더십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배려와 사랑
다윗은 헌신과 배려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말을 기억한다. ‘네가 왕이 될 것인데, 그때 내 자식들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따라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만 알고 싶어 하고 기억하기를 즐겨한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애를 써서라도 지워버리려 한다. 그러나 지도자로 헌신된 사람은 자신의 필요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대로 행하기를 즐겨한다.
다윗이 사울의 집에 남은 자가 있느냐? 물으니, 사울의 종 시바가 대답한다. 므비보셋이 절뚝발이가 되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말한다. 그가 절뚝발이가 된 배경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음을 알고 유모가 안고 도망하다가 떨어져 그렇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사울의 죄가 가문과 손자의 고통을 가져온 것이다.
왜 유모가 도망을 가는가? 유모도 사울이 다윗에게 죽을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배려의 마음으로 므비보셋을 찾았다. 그리고 그와 한상에서 먹는 다는 말로서 그의 왕자의 신분을 회복시키시고 그에게 사울의 재산을 다 돌려주었다.
그런 와중에 다윗이 처음 므비보셋을 찾아 만났을 때 성경의 장면은 감동을 준다. 므비보셋은 말한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무슨 말인가? 민폐만 끼칠 뿐 왕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를 찾으십니까? 라는 뜻이다. 아버지 요나단과 다윗의 관게를 생각하면 먼저 찾고 청탁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다윗을 염려하는 모습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죽은 개’같다는 비유는 지극한 겸비한 마음의 표현이다. 자신의 처한 위치가 어려움에도 다른 사람을 향해 배려의 말을 할 수 있는 므비보셋같은 성숙한 인격은 능히 다른 사람을 감동케 하며, 다윗 왕과 한상에 앉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한결같은 성품
므비보셋에 반대되는 인물이 시바이다. 다윗 왕이 불러서 물었을 때, 시바는 다윗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로 므비보셋의 약점을 나쁘게 표현한다. 이전에 사울 왕을 모시던 사람이었는데, 옛 주인 왕의 손자인 므비보셋의 단점을 가지고 그를 설명한다. 절뚝발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표현한다. 상대방에 대해 배려와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시바의 식솔들이 모두 그 므비보셋을 섬기도록 임명이 되었다.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성품의 결론이다.
형편이 변했다고 한결같이 남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복이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집안의 머슴이 밖에 나가서 돈 벌고 출세했다고 고향을 찾아온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온 것이다. 그리고 부모부터 섬기던 주인을 김씨, 김서방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터지니, 이제는 완장을 차고 설치는 인생이 되었다. 인생의 존귀함을 알지 못한다. 결국 비천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전쟁 중에 지상인민낙원이라고 말하는 북한에 올라갔는데, 결국은 아오지 정치범 수용소에 가는 것 밖에는 없는 인생이 되었다고 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헌신되지 못한다. 헌신되지 못하면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한결같은 사랑과 배려의 마음이 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 그런 교회, 그런 가정을 복되게 사용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davidnjeon@yahoo.com
05.1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