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를 지나는 지혜

-회복. 은혜, 영적 면역력
전남수 목사

회복의 방법

 

성경에서 선지자가 등장하는 시기를 보면, 그런 때는 대개 어렵고 힘든 난세였음을 보게 된다.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고자 고난을 허락하시고, 그 고난의 고통을 통해 부르짖게 하시면서, 회복과 축복을 맛보게 하시는데 그런 과정에서 회복의 도구로 선지자를 보내주시는 것이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알며, 그 말씀을 붙들고 돌아오라는 회복의 사인이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너희가 망할 것이며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선포하지만 궁극적인 결론은 회복이었다. 모세가 등장하던 시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란과 고통 중에 가장 크게 부르짖을 때였었다.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도구가 모세를 통해 증거된 말씀이었다. 영원한 회복자 예수님이 오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죄로 인해 흑암의 권세가 뒤덮고 있을 그 때에, 그 죄악된 세상을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의 빛으로 환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운 시기라고 한다면, 더욱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중심하여 회개의 제목을 찾으며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이 친히 해결해 주시도록 길을 찾아야 한다. 그때 회복의 빛이 비추일 것이며, 회복을 지나 축복을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것이다.  

 

종말적 난세현상 

 

회복의 말씀을 어디서 누구에게 듣는가? 어떤 사람이 이 시대 가운데 하나님이 쓰시는 메신저가 될 수 있는가? 난세라고 칭해지는 이 시대에 세상과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것일까? 어떤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상의 대안, 세상에 소망을 주는 교회를 세우셔서 세상을 구하시기를 원하실까? 어렵고 힘든 역사의 모든 문제가 그렇게 풀려지듯,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세우셔서 그로 하여금 당신을 대신하여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가운데, 죄와 흑암의 어둠을 물리치고 마침내 빛 되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우리 자신들과 교회가 이러한 난세에 하나님이 쓰시는 빛으로, 회복의 통로로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염병, 괴질의 문제가 온통 세상의 소식을 뒤덮고 있다. 어떤 목사님은 목회 40년 동안에 단 한번도 주일 예배를 쉬어본 적이 없으셨는데. 이제는 그 평생을 지켜온 예배를 마음대로 드릴 수 없는 종말이 되었다고 탄식하신다. 그러나 또 어떤 분은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미래의 예측 뉴스들을 이미 경험해본 것처럼 이야기하며, 찾아오지 않은 두려움을 장황하게 전파한다. 이처럼 예배의 폐함을 걱정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목회자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기에 어디서나 예배드려도 가능함을 널리 전파하는 일에 힘을 쓴다. 그것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설명한다. 

분명 전염병의 문제는 우리 자신만을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분명히 공동체 속에서의 배려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생명 같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단편적인 뉴스에 의한 정보의 상식이 말씀과 기도에 앞서는 것을 보면, 분명 이 시대는 눈에 보이는 괴질을 넘어서는 진짜 종말적 난세현상을 드러낸다 하겠다. 어려움을 만났음에도 기도와 말씀보다 인터넷이 더 흥왕하고, 은혜의 사모함과 감동보다 호들갑이 더 앞서는 것을 보면 목사로서 참담한 마음이 든다.  

 

지킬 것은 지켜야

 

변함없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무슨 일을 만나도 한결같은 은혜의 끈을 붙잡고 사는 이들을 보면 참 좋다. 지킬 것을 지키는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 정하신 대로 할 때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목련꽃도 하나님이 정하신 봄에 필 때 아름다운 것이며, 국화는 쌀쌀한 가을날씨에 이슬 머금은 꽃의 자태가 아름다운 것이다. 자연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셋팅 속에 있을 때 아름다운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 속에서 참된 회복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 우리에게는 행복이 된다. 거룩한 주일 온전한 예배를 지킬 때, 말씀과 기도에 붙들려 세상에 요동하지 않는 모습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인생, 행복한 삶이다.

 

믿음과 소망

 

지킬 것을 지키는 신앙은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환란과 고난의 모든 문제들, 인생의 생사화복 희로애락이 모두 주께 속해 있음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한 분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는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 그러나 한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믿음이 서 있지 못하면 아닌 것처럼 행동하여도, 결국은 세상과 타협하는 부조화의 인생이 되고 만다. 때로는 심판처럼 다가오는 일이 있다 하여도, 결코 멸망을 위함이 아니기에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복을 맛보고 찬양으로 영광 돌리게 될 것이다. 아무리 환란의 어두운 밤을 지난다하여도, 하나님을 찾으면 언제라도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 믿음, 구원받은 후부터 함께 하심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언제나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환란에서 지켜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귀처럼 들락날락, 왔다 갔다 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한결같이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험하는 것이 힘이 되고, 생기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그 하나님 한분을 알지 못하면 살았으나 결국은 쇠하고 망하는 길을 걷게 된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믿음이 왜 견고하게 한결같이 세워지지 못하는가? 소망의 부재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삼일 후에 그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다면, 하루 이틀 참으며 견디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친구 집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 집에 놀러가자고 말하는데, 친구의 첫마디가 ‘우리집 못산다. 괜찮겠나?’그런 말을 한다. 초등학생 어린 마음에도 가난과 부에 대한 마음이 들어있음을 보면 조금 서늘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 집을 가보면 가난하고 어려워 보인다. 녹슨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사람이 겨우 서 있을까 싶은 작은 쪽마루가 문 앞에 있고, 그 마루를 지나 문을 열면 온 가족이 사는 한칸 방이 열린다. 친구의 얼굴이 미안한 듯  하지만 이내 큰소리로 한마디 당당하게 외친다. 작은 방 문 입구 위, 누런 종이에 그려진 붉은 글씨를 가리키며 자랑하는 것이다. 

자기 집이 비록 이렇게 가난하지만 삼년 안에 운수 대통할 것이라며 자랑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 속옷에 붙어 있는 작은 봉지 같은 주머니에 담긴 또 다른 붉은 그림 종이를 보여준다. 점쟁이가 적어준 것이다. 점쟁이가 적어준 그 부적 종이쪼가리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도시락 반찬도 제대로 싸오지 못하는 아이이고, 다른 친구들과 싸우면 두들겨 맞기 일쑤인 데도, 애는 당당하다. 교회 다니는 나보다 훨씬 더 강한 믿음을 선포한다. 우리 집 잘될거야. 그때 두고 보자, 두드려 맞고도 괜찮다고 말하며 나중에 저 친구에게는 빵 안 사준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부적쪼가리가 그 친구에게는 믿음과 소망의 제목이 된 것이다. 그 소망이 그로 하여금 여유와 담대함을 준 것이다. 물론 그 이후로 들려지는 말들은 여전히 그 집이 어렵다는 소식이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군인의 얼굴에는 늘 여유가 가득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 국방부 제대날짜가 소망이 되기에 늘 얼굴이 훤하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먼 이등병의 얼굴에는 슬픈 그림자가 가득하다. 제대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에는 그 소망이 너무 빈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범죄로 심판을 받고 있을 때. 선지자들의 한결같은 메시지는 하나님을 찾아라,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소망을 두고 돌아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근심하고 걱정하던 것을 멈추고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말씀들이었다. 자신의 못나고 부족함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끝없는 원망과 절망밖에는 없다. 그러나 참 생명의 소망되신 하나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면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심으로 믿음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은혜-영적 면역력 

 

믿음과 소망은 은혜를 통해 견고해진다. 은혜는 허락하신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타나며, 이는 예배를 통해 온전히 전이되는 것이다. 작금의 어려운 염병의 문제들이 심각하게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서나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하면서, 혹여 모를 예배의 실패가 가져올 눈앞에 보이는 바이러스의 문제보다 영적 면역력이 떨어짐으로 가져올 더 큰 문제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영상예배, 온라인 헌금, 가정예배들이 부정적인 측면으로 정착될 것 같은 마음에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교회 안팎에 실제적인 걱정과 염려들이 있다. 조금 전 근처 인근 대도시가 뚫렸다는 뉴스가 전파된다.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시겠지만 우리민족이나 미국에 사는 우리 이민자들에게 큰 짐이 된다. 특별히 이로 인해서 아시안 사람들이 마치 질병의 전파자인 것처럼 취급받는 상황이나, 팍팍한 이민사업체 가운데서 성도들 생업의 어려움들을 생각할 때에 마음에 힘든 것이 많다. 또한 성도들 가운데 건강하지 못한 성도들과 연로하신 분들에 대해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모든 문제들의 대부분이 아직 이르지 않은 문제들을 미리 염려하는 마음의 병이 훨씬 더 큰 것 같다. 영적 면역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문제임에도 가까이 접하는 뉴스들로 인해 훨씬 많은 공포와 두려움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말씀과 기도

 

호들갑 떨지 않고 말씀을 더욱 붙들어야 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고히 세워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두려움과 공포는 성령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바냐 3장 16절에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염병의 두려움들로 세상의 소식이 가득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만족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두려워 하지마라!” 덧붙여 두려움을 몰아내는 비결을 말씀하신다. 기도의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가 모든 두려움 모든 근심 모든 염려를 물리치고,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평안하게 하실 것이다. 

모든 환난의 때를 지나가는 비결은 말씀과 기도의 손을 모으는 것, 은혜 외에 달리 답이 없다. 그렇게 은혜를 구하며 믿음가운데 잠잠히 나아갈 때, 주께서 모든 것을 복되게 하시고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환란을 통과한 신앙에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더불어 현재적 삶에서 그의 임재로 인한 기쁨, 감사, 평강이 더욱 넘치게 되리라! 

davidnjeon@yahoo.com

03.1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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