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변화, 나의 몫이 아님

-성향, 생각, 고집-
전남수 목사

10년을 교회 다녀도 자신의 인생에 잘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10년을 성경공부 하여도 자신의 삶에 변화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들으면서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계속해서 10년을 다녀도 삶에 좋은 일과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교회와 목사는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될 따름일 것이며, 자신은 원망과 불평의 주체가 될 따름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모질고 질긴 사람이었으면 10년을 다녀도 변화와 열매가 없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할 수만 있어도 그는 결코 교회와 목회자를 원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인생을 원망과 불평으로 잃어버린 10년으로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궁극적인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관점의 변화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고집스럽고 자기 생각으로 가득찬 야곱의 인생이다.  

 

경쟁적인 성향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경쟁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온 형 에서의 배가 고팠다. 야곱이 그것을 그냥 퍼서 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야곱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형이 가진 장자권과 죽 한 그릇을 바꾸게 된다. 겉으로 보면, 그냥 별 볼일 없는 약속으로 보인다. 그들이 그 말을 할 때 무슨 서로 간에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야곱의 생각은 집요했고, 마침내 장자권 싸움은 얼마 후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 이삭이 나이 들어서 앞을 볼 수 없는 때가 찾아왔다. 그 때 이삭은 큰 아들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 주려고 했다. 그 때 그의 아내 '리브가'는 두 아들이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큰 아들이 둘째 아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그것을 보면, 어머니 리브가의 믿음은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잘 기억하는 것인데,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법인데, 이를 기억하는 리브가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을 실행하는 리브가의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 남편하고 과거에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도적놈처럼 그 장자권을 가로채려고 남편 이삭을 속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 리브가의 계획에 야곱도 선뜻 동의하고 순종한다. 야곱이 그것을 거부했어야 했음에도, 그는 그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른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에게서 받게 되지만, 현실로 볼 때 야곱은 부모님의 집을 떠나야 했고, 130년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세속적인 생각

 

야곱이 고생했던 이유는 그의 마음이 언제나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노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돌베개를 하고 누웠던 돌을 제단삼아 기름을 붓고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를 드리며 온전히 살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증거이다. 은혜 받은 사람은 결심한다. 결단한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마음에 그 감동을 삶의 헌신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삼촌 집에 들어가 머물면서 그의 눈에는 삼촌의 딸, 라헬이 눈에 들어왔고, 마침내 사랑에 빠졌다. 그는 한번 생각한 것은 누가 뭐래도 성취하고 마는 성격이었다. 이것을 고집이라고 한다. 고집은 자신을 고난가운데 이끌어간다. 그는 한 여인을 얻기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을 힘을 써서 삼촌을 위해서 일한다. 삼촌에게 속아 갑절로 일하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마침내 라헬을 얻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헬은 자기 몸종을 야곱에게 내어주면서 자식을 낳으라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 언니 레아가 아이를 잘 낳았기에 그 경쟁에서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쟁이 심해져 자매간에 자신의 종들을 통해서까지 야곱의 아이를 낳게 한다.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때문에 야곱은 마땅히 그것을 거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거부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의 생각과 형편을 따라갔다.

 

고집스럽고 질긴 생각

 

야곱은 열 두 아들과 딸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했다. 그 집은 언제나 복잡했다. 조용할 날이 없었다. 매일 형제들끼리 싸우고 아내들끼리 싸운다. 그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처럼 야곱의 젊은 시절은 한마디로 복잡한 인생의 시간이었다. 연애하고 일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살다가 젊음의 세월을 모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시작과 과정과 결론에 그의 고집스런 생각들이 숨어 있었다. 야곱은 또 삼촌 때문에 재산을 모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야곱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일했지, 삼촌을 위해서 봉사했던 것이 아니었다. 가게 주인이 일꾼을 고용할 때를 생각해 보라. 직원을 고용하면서 주급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을 하면서 보니, 일이 너무 잘되어서 주인이 부요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랬더니 어느 날 주인을 찾아가서 자기 때문에 일이 잘 되고 있는데, 왜? 내게 더 많은 돈을 주지 않느냐고 따진다고 하면 말이 되기 어렵다. 처음에는 일이라도 시켜주면 감사하겠다고 해놓고 마음이 바뀐다. 야곱이 삼촌에게 그러한 태도를 가졌던 것이다. 결국 야곱은 삼촌으로부터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결국, 라반이 군사를 이끌고 오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오히려 손자들을 축복하고 라반은 돌아가게 된다. 인생이 연약함이 있어도, 벧엘로 돌아오는 그 걸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 것이다. 그러나 근본이 변하지 않으면,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형 에서가 이십년 만에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날 밤에 야곱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강 건너로 넘겨 버리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기 시작한다. 늘 필요할 때만 찾는 하나님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다시 야곱을 만나주신다. 그리고 그의 이름까지 바꿔주셨다.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후, 하나님의 지극한 간섭으로, 그 다음날 그렇게 두려워하던 형 에서와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면 야곱은 곧장 벧엘로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야곱이 형에게 말한다. ‘형님, 조금 내가 이 곳에 머물다가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가십시오.’ 그렇게 말을 하였음에도, 실제 그는 그의 눈에 들어온 살기 좋은 세겜을 놓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소와 양을 키우기 좋은 세겜에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십여 년을 그곳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딸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에 의해서 강간을 당한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라는 거룩한 예식을 사용한 큰 살인극을 벌이게 된다. 하나님이 머물라 한곳에 머물지 않으면 언젠가는 문제가 터지는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야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런 순간에도 야곱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음성이었다. 야곱은 그 말에 순종하여 그동안 자신의 집안에 있던 모든 이방신상을 제하여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며 예배를 회복한다. 이때부터 야곱의 인생에는 궁극적인 관점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궁극적인 관점의 변화

 

야곱은 하나님의 집, 벧엘에 머물며 예배의 단을 쌓으며,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가장먼저 요셉의 죽음 앞에서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애통한다. 한마디로 회개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의 사정을 잘 안다. 서로간의 갈등과 어려움이 있음을 훤히 안다. 자식들이 요셉이 죽었다고 말할 때, 그는 짐작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식들이 어린 동생하나 챙기지 못함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애통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 있음을 믿은 것이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참된 예배자의 변화의 모습이다. 

그는 또 양식이 떨어졌을 때, 자녀들을 보내어 애굽에서 양식을 구해오도록 말한다. 자녀들은 동생을 볼모로 잡히게 하면서까지 양식을 구해오지만 그 양식마저도 떨어지게 되었다. 그때 야곱의 하는 말이 무엇인가? 양식을 조금만 더 구해오라고 말한다. 그의 인생은 다다익선의 삶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하는 인생이었다. 세상적인 가치관이다. 아내도 많으면 좋고, 자식도 많으면 좋고, 소와 양도 많으면 좋고, 하나님이 싫어하셔도 애 키우기 좋고 재산을 번식하기 좋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아도, 아무 곳에라도 집과 우릿간을 짓고 살며, 자녀들이 영적으로 어떠해도 그저 가축의 양만 많아지면 아무 일 없는 듯 지내는 인생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많은 것과 적은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죽이시던 살리시던 예배자가 가지는 지족하는 마음이다. 

야곱은 아들 요셉을 통해 바로를 만나게 된다. 바로왕이 연세를 물으니, 험악한 세월 130년을 보냈다고 말한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으로 이끌어왔던 인생이 허망하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고백은 허망한 신세한탄을 탄식하는 비천한 것이 아니었다. 그 고백과 함께 70명 먹고 살기위해 찾아온 이민자의 가장이, 당대 애굽나라의 바로에게 축복기도를 하는 것을 본다. 당신이 비록 강한 제국의 왕이지만 하나님이 치워버리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왕임을 담대히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참된 예배자가 경험하는 담대함과 당당함의 표현이다.

야곱의 인생도 애굽에서의 17년 세월이 흘러 147세에 거의 임종이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그때 요셉이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축복기도를 받으러 왔다. 일국의 총리가 곧 생명이 마감될 연로한 노인 아버지에게 자식의 축복기도를 구한 것이다. 그러한 기도의 요청에 대해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야곱이었지만, 그는 손을 얹어 손자들을 축복한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감격으로 지팡이 짚을 힘만 있어도 하나님을 예배한 변화된 참된 예배자가 야곱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이가 들면서 고난의 세월을 지나며 사람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강해지고 더 더러워지는 사람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악질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길은 다른 것에 있지 않다. 하나님아버지께로, 교회 앞으로, 예배 앞으로, 나의 벧엘을 향해 나아올 때, 주께서 친히 바꾸시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닌가? 그러나 벧엘의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실 때, 우리의 삶은 세월이 지날수록 아름답고 존귀하고 영화로우며 향기로울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2.2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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