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참된 변화와 회복

- 교회, 예배, 제물
전남수 목사

변하지 않는 사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많은 목회자들이 동의하는 대목이다. 이단도 처음부터 이단으로 시작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신학교가서 좋은 목사가 되고자 했을 것이지만, 그가 타락을 하니 그동안의 배운 것도 무의미해진 채 이단의 교주가 된 것이다. 다리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엘리야처럼 기도하던 그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교회와 목사를 대적할 줄 어떻게 알았을까? 개척멤버라고 해서 가족처럼, 형제처럼 사귐을 가졌는데 한순간에 등을 돌리고 목사를 비리투성이로 몰아세운 채, 내어 쫓으려고 칼을 들었다면, 대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물건은 고쳐서 쓸 수 있지만 사람은 울어도 변하지 않고 늘 타락을 향해 걸음이 바쁜 존재여서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어떤 분이 군에서 보통군사법원 법무처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고 한다. 한번은 그에게 민간인 인질을 총기로 쏘아 죽인 2명의 군인을 사형시키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보고서를 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멀리서 총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것을 보기 위해 사형장을 찾았는데,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대조적이어서 놀랐다는 것이다. 

한사람은 그렇게 서럽게 울더라는 것이다. 옷이 젖도록 슬피 우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고백을 하며, 대통령에게도 미안하고 국민에게 물의를 끼친 것도 미안하다며 눈물로 고백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지니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쪽 한 사람은 절대 울지 않더라는 것이다. 원망과 불평이 없는 게 없고 욕이란 욕은 다하면서, 원망과 불평으로 점철된 자신의 생을 마감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용서를 구하던 사람을 보니, 총을 맞는 순간 아무 소리 없이 그대로 숨을 거두는 데 반해, 원망으로 점철된 그 사람은 온 몸을 뒤틀면서 7초를 더 지나가더라는 것이다. 그분의 결론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그들이 가진 그 성질에 따라 확연히 다른 생명의 마지막 모습을 결정하더라는 것이다.

흔히, 성질을 죽인다는 표현을 한다. 성질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죽음을 통과하듯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질이 더러운 사람은 죽어도 팔딱팔딱 뛰고, 악질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함에도 그 성질이 그의 몸을 저항하게 만들더라는 것이다. 스스로 더 고통스러워질 뿐인 것이다. 

 

신앙과 변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변화되지 못하면 자신이 가장 고통스럽다. 다음으로 그 주변과 공동체를 힘들게 만든다. 참된 신앙의 삶을 살다가 부름을 받으신 분들은 그 죽음의 순간마저도 곱고 아름다우며, 모든 이들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악한 인생은 죽었다 살아나고, 죽었다 살아나고를 반복하는데, 의사가 그 아내에게 남편의 죽음을 말하여도 생전에 얼마나 가족들을 힘들게 하였던지 아내와 자식들마저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더라는 것이다. 

어느 장로님이 신장에 문제가 생겨 사돈의 신장을 제공받게 되었다.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모든 수술경과가 좋다고 해서 감사함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치료과정에서 혈액에 감염이 되어 생명의 큰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때 그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에 모두가 놀라운 마음을 가졌다. ‘나 더 이상 예수 안 믿을래’ 하는 것이었다. 평생 예수를 믿은 장로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인생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할머니 권사님은 새벽기도회를 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만났음에도, 그 권사님의 고백은 ‘새벽기도 하러 다니도록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더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참된 생의 변화를 맛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안에 거듭난 사람들의 참된 변화의 모습은 그 뒷모습까지도 아름답게 만든다. 공항을 가보면 갈 곳이 분명한 사람은 쉽게 걸음걸이를 옮기는 것을 본다. 그러나 한때 예수를 믿었지만 그 마음중심에서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마지막 순간 그 불안함이 예전에 다니던 절의 중을 찾아 목탁을 치게 만들더라는 것이다. 행여, 그가 직분자라고 할 때 인생은 정말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순전한 신앙, 단순한 믿음

 

순전한 신앙은 단순한 믿음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 것을 믿어야 한다. 죄를 지으면 이런 어려움이나 병도 생기고 하나님이 혼을 내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작은 접촉사고만 나도 성수주일 제대로 안했더니 이런 일이 생기는 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신앙생활은 훨씬 깊은 성숙의 자리에 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삶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하나님과 연결해두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기도안하니 자식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구나 그렇게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자식이 원하는 만큼 살아가지 못하면 부모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 부모인 나의 탓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부복하며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가족공동체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자로서 선생님 앞에 항상 ‘제가 잘 모릅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되고 올바른 제자가 될 수 있다. 스승은 그런 제자에게 아까운 것이 없을 것이다. 영적생활에 있어서도, 듣기는 속히 하며 말하기는 더디 하고 순종에는 아주 빠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응답도 훨씬 빨리 나타나는 것을 본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순종 안하는 교회는 기적이 없다. 교회에서 난리를 치는 데도 속수무책이다. 교회가 능력이 없다. 예수 이름을 불러도 효과가 없다. 교회가 말씀 앞에 일치하여 순종하지 않는 그 표리부동함이 그 능력을 쇠잔케 한 것이다. 

신앙은 말씀을 듣는 가운데 믿음이 들어옴으로 마침내 능력이 된다. 공부와 논리를 따라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험하며 맛보는 것이다. 상식을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공부를 그렇게 하고도 믿음이 생기지 않은 이유,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는 지식까지만 믿기 때문이다. 진짜 믿음은 총칼이 와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날마다 죽노라, 제물

 

변화되지 않는 우리들의 습관과 성질, 어떻게 바꾸어질 수 있는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것도 한번 죽어서는 안 되고, 매일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고운 가루처럼, 죽어지고 빻아지고 태워져서 하나님 앞에 고운 향기로 올려져야 한다. 

제사의 제물은 죽음을 전제로 한다. 제물이 죽으면 같이 살게 된다. 죽음을 통과한 변화가 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앙은 지식을 연마하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배워서 축적해서 멋있게 써먹으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면 주님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바로 이 고민이다.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에 비유한다. 교회로 나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가 모태속의 아기와 같은 평강을 맛보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죽어야 다시 태어난다. 고쳐서 쓸 수 있는 물건도 있겠지만, 구원 얻는 생명은 오직 거듭나는 것뿐이다. 한번 거듭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입술의 신앙고백으로만 가는 줄 알기에, 구원받아도 마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다가 직분의 이름만 걸치고 죽음에 이르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본다. 중요 직분자였음에도 마지막 순간이 악질 그대로의 죽음이 될 때 그 구원조차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죽었던 자아의 옛 모습들이 불쑥불쑥 살아나기 때문이다. 

 

날마다 다시 태어남, 예배

 

한국에서 생선회 집을 가보면 식탁에 올라온 생선이 분명히 죽었음에도 눈을 껌뻑껌뻑하는 경우를 본다. 아무리 죽여도 제대로 죽지 않는 모습이다. 그 생선을 보면서 생각했다. 죽어야 할 때 제대로 죽지 못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렇다. 온전히 주님을 따라가고 변화가 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죽지 못함으로 삶에 여전히 남아있는 변화되지 못한 습성과 습관, 악한 성질들,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다. 

해법은 무엇일까? 다시 죽었다가 태어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거듭나는 것이다. 매일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어머니와 같은 교회로 가야 된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듯, 예배 가운데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 앞에 드리고, 주의 은혜로 새 생명의 감격을 맛보고 사는 것이다. 그 은혜가 그를 살리고, 새롭게 하며, 변화된 아름다운 인생으로 빚어주실 것이다.  

 

11.0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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