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된 인생의 연약함
최근에 교회를 방문한 어느 성도가 질문을 했다. 평생을 교수로 사시면서 은퇴하신 분이신데, 나름대로 학문의 지식을 가지신 분이시다. 조심스럽게 질문하기를, 왜 목사님들은 엉터리(?)같은 트럼프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이었다. 불법이민자들에 대해 다리에 총을 쏘거나, 국경 접경지대에 공격적인 짐승을 풀어 놓아서 그들을 해치도록하며, 그의 말하는 언어들이 전혀 호감을 줄 수 없으며 지도자의 품격이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목사님들이 트럼프같은 사람을 지지 하느냐 하는 의문이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이리저리 상식을 들어 설명하고자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지혜로우신 집사님이 한마디 하셨다.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 자체를 신뢰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정책 중 반동성애 등의 일부정책에 대한 지지일 따름이다. 사람자체를 어떻게 믿고 지지하겠나?” 전구를 반짝이게 만드는 명답이었다. 죄인된 인생의 연약함에 대해 적절하게 지적하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답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위정자들에 대해 지지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성도의 책임이고 의무이다. 그러나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품격은 미국의 지향점은 아니다. 미국은 나누고 베풀고 섬기는 리더십을 가진 나라이지, 자기 배만 위하듯 하는 것은 온전한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동성애 합법화의 문제들은, 다른 어떤 부분을 내려놓더라도 결코 우리 교회들이 양보할 수 없는 것이기에, 보수적 신앙의 관점에 부합된 정책을 포함하는 트럼프 행정부를 지지하는 것이다.
조국, 대한민국, 편법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한 장관에 대한 좌우 진영의 세력싸움이 대단하다. 오늘 아침에 그의 사임소식이 들려지지만 두달 동안 진행된 일들을 보면, 한국사회가 얼마나 좌우 진영의 편가르기가 도를 넘어섰는가를 알게 된다. 한마디로, 사람자체에 대해 신앙적인 믿음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좌우 모두 하나의 종교집단들이 행하는 것처럼, 상식과 이성을 넘어서서 무조건적지지 속에 내일을 예비하지 않을 듯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다.
뉴스를 통해 보면 그의 모습은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법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교수의 신분으로 너무 법을 지나칠 정도로 애용(?)했다는 것이다. 편법이 너무 지나쳤다. 과거 그의 정의롭고 옳은 말들이 다시 그 자신을 옭아매는 올무가 되었다. 겉과 속이 다른 내용들이 새로운 주말 드라마를 기대감속에 보듯이,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가족과 가문에게서까지 그 숨은 폐해들을 드러냈다. 재정운용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속물 자본주의적 발상과 행태를 이어오면서도, 앞에서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말과 글로 도배를 하며 많은 이들을 속여 왔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자녀를 위한 입시제도에 있어서 드러난 불법과 편법에도, 그와 그의 정치세력들은 절차의 불법성이 없음을 주장한다. 품앗이 하듯 가진 자들의 부모들이 상호 상부상조하는 데, 인맥이라는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할 수 있으면 왜 못하겠느냐? 그렇게 지지발언을 이어간다.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한국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다. 지금 국회의원이상 가진 자들의 자녀들을 조사하면 제2, 제3의 조국이 얼마나 많겠냐? 그렇게 반응한다. 실제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인생 전부를 걸고 이민 오신 분들을 보면 그런 상황이 이해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고3 아이를 둔 한국의 친구목사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학을 진학하는 방법이 수백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타국에 머물면서 아이가 12년 동안 한국의 학교에 재학한 기록이 없는 경우 유명 사립대 특별전형에 해당되기에, 부모가 낯선 타향에서 떠돌이 방랑생활을 할지라도 오직 아이의 진학을 위해서는 당연히 희생한다는 것이다. 한국 부모들만이 가능한 이야기이다.
인간죄성, 표리부동, 관용
조국이라는 사람의 이력은 화려하다. 부족함 없는 가정가문에 학력과 기타 사회적 조건에 있어서 우월한 기럭지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런 저런 평범한 소시민 졸부들에게나 나타날 일들이 일어났으니 경천동지할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 인간죄성의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들은 이해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사람자체에게 무슨 완전함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표리부동한 면을 가진 인간죄성의 열매를 가진 사람이 어디 그 사람뿐이겠는가? 어떤 면에서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인간이 없는데, 그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그는 아주 명석하게 이용한 것 아니겠는가? 자식성공 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 어디 있는가? 도적질을 해서라도 자식을 출세시키고 싶은 것이 부모 아닌가?
돈 버는 데 점잖게만 벌려는 사람이 몇이 되겠는가? 이 땅에 겉으로 양복에 넥타이 매고, 뒤로는 음흉한 짓을 일삼으며 속과 겉을 다르게 포장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멀리 볼 것 없이 우리의 내면의 죄성을 생각할 때, 그 악함이 우리자신을 얼마나 놀라게 만들던가? 유명하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우리가 누군가의 집중탐사의 주인공이 된다면 멀쩡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드러난 것 보다 더 염려
조국 장관에 대한 ‘편법의 내로남불’과 ‘불공정의 정의’에 대한 염려는 인간의 죄성에 비추어보면 설명가능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먼 이민 땅 타국에서 살아가며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이민자들의 마음은 그러한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사상과 행위의 결정 근거가 조국 개인자신의 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 정권 전체가 가진 사상적 조류의 판단준거가 된다는 데 심각함이 있는 것이다. 금번 사건에 반응하는 정부의 행태나 정치가들의 입장을 보면 저들이 과연 한 나라의 지도자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일견 지도자라고 할 때, 나라와 민족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충성이 최우선 요구되지만, 이들의 행태는 일반 개인의 상식적 기준으로서도 합당치 못한 것이다. 자신과 생각과 견해를 달리하면, 그 생각의 꺼리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취급한다. 그들에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의 절차는 필요하지 않다. 나를 반대하면 무조건 부모죽인 원수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그 생각의 갈래들 속에서 좌와 우 어느 한쪽의 선택의 결과지만을 강요당할 뿐이다.
참과 거짓. 유익함
과연 이들이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인가? 보통의 범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이 배우고, 고도의 정치적 훈련을 통하여 나라와 민족을 섬기기 위해 자원하여 나온 이들이 저들 아닌가? 그러나 금번 조국 사건을 통해서 드러낸 것은, 오로지 더러운 욕심에 근거한 정치집단의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자체보다 목적자체가 모든 지향점이 된다는 것이다.
변형된 사회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하지만, 과거 우리 부모세대가 겪었던 공산주의의 출산물과 같은 결과이다. 한마디로, 사상에 경도된 고집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과 딸, 부인 등 수많은 불법적인 일들이 매시간 보도가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서는 좌고우면 없이 직진한다, 마치 사상을 위해서라면 가족의 등에도 칼을 꽂았던 공산주의식 사고행태이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로서는 불가해한 일이다.
참과 거짓은 그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에게 참과 거짓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편가르기만 있을 따름이다. 한국적 상황의 부적절성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는 말이 ‘너도 친일파냐?’부터 시작하는 것을 본다. 옳고 그름, 이해와 설득을 통해 드러낼 많은 일들에 대해 대화가 진전되지 못한다. 편협된 생각의 갈래들을 보면 전혀 상식적이지 않음을 본다. 사람에 대해 신앙을 요구하는 것을 본다. 그런 광팬이 존재하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을 따르는 일이 바탕은 되어야 나라꼴이 되지 않겠는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금번 일을 통해서 드러난 유익함도 있다. 그의 생각과 삶과 판단준거들을 보면서 진보진영의 정의로움이란 것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저들의 위장된 선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보수진영이라고 해서 온전할 수는 없겠지만, 기대감 자체가 다를 것이기에 비교불가한 것이다. 정의로움이라는 이름의 사상에 경도된 채 저들 정치세력이 가지는 장기집권의 꿈을 그대로 인정하고 갔더라면 조국과 민족의 미래는 정말 참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조국사태로 인해 진보와 보수, 어느 세력이 집권을 한다 하더라도, 진보의 민낯을 알아챈 국민들의 학습효과에 의해 이제는 어느 세력이든 견제 속에 균형 잡힌 정부를 꾸려가지 않겠는가? 절망중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 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성도다운 해법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다시 성도다운 해법을 생각한다. 긍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주님을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바라볼 것을 생각하게 된다. 느헤미야와 같은 마음으로 통곡하며 기도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민자의 삶의 현실에 얽매여 순간순간 그냥 고통 속에서 살아가다 보니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내게 나타난 문제가 아니면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니, 조국을 위해 울 일도 없고 금식할 일도 없다. 느헤미야처럼 조국을 생각하면서 오랜 시간 금식하며 통곡하며 기도할 일은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신의 일에만 경쟁하고 싸우고 욕심에 얽매여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민자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알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 다시 또 다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느헤미야의 마음속에 있던 조국 이스라엘을 향한 그런 불타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그저 밥 한 끼 굶은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다. 기도해야 한다. 급한 만큼 그렇게 목숨을 걸고 기도할 때,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10/19/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