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의 사랑하는 종
로마 군대 백부장 집에 한 종이 병들어 앓아눕게 되었는데, 누가복음은 그 종을 가리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한다. 병행본문을 보면 그 종의 병은 심한 중풍이다. 병의 심각함은, 백부장이 그 종에게 행한 것을 다른 이들이 보고 말함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열심히 의원도 부르고, 종의 병 때문에 근심하는 것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많은 이들이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종의 병이 낫지 못한 것을 볼 때, 이미 심각한 중증이었으라 짐작된다.
의문이 생긴다. 종은 당시에 ‘말하는 짐승’에 불과한 도구적 존재인데, 백부장은 왜 그를 그렇게 ‘그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표현할 만큼 가족처럼 돌보고 최선을 다했는가 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가 예수님에게 보낸 유대 장로들의 입을 통해서, 그가 식민지 백성들을 무척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회당도 지어준 것까지도 알게 한다. 한마디로 백부장은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백부장의 그런 친절과 사랑은 어디서 왔을까? 타고났을까? 그러나 배경이 맞지를 않는다. 그는 이방인이고 헬라문화와 철학적 사상 속에 자랐고, 더구나 군인이라고 할 때, 짐승 취급받던 식민지 종을 가족 같은 사랑으로 돌보았던 그의 성품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과 믿음
헬라의 철학과 사상은 ‘용기, 힘, 싸움’이 미덕이다. 긍휼, 자비, 사랑은 연약한 자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고 규정한다. 게다가 군인이면 더욱 혈기왕성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품을 생각하면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유대 땅에 와서 근무하는 동안 말씀을 듣고 배우며 하나님을 만나 사랑과 자비를 배웠을 것’을 미루어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만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게 넘치는 분이시라는 것과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을 때에 당연히 그런 처신과 행동이 나타날 것을 짐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를 믿고, 배우고,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면 당연히 그런 성품의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성품의 변화는 무엇일까?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믿음의 시금석이 된다.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까? 나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싹 트고, 자라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 없는 오래참음은 미련한 것이며, 사랑 없는 평화와 온유함은 냉소를 드러낼 따름이며, 사랑 없는 기쁨은 정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과 일상적인 은혜
기적을 보는 위대한 신앙도 있지만 일상에서 쓰임 받는 믿음의 모습들이 그렇게 사랑을 본질로 하여 삶속에 드러날 때, 참 아름다운 성도의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런 삶이 복된 것이다.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죽기 전에 세 가지를 깊이 후회한다고 한다.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나누지 못하고, 더 헌신하지 못한 것을 제일 우선순위로 안타까워한다. 모두가 사랑에 뿌리를 둔 열매들이다.
한국을 가서 교회를 방문해보면, 되는 교회와 부흥하는 교회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다. 세 가지가 유별나더라는 것이다. 기도소리, 웃음소리가 크고 밥맛이 좋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런 교회들에 대한 결론적인 마음은 ‘내가 거기 가서 산다면, 나 같아도 저 교회 가서 신앙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성도들의 신앙에서 홍해를 가르고, 병자가 일어나고,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고 간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더욱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 세상 앞에 복된 향기가 나게 하는 것은 기본적인 신앙으로서 성품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변하여 새 사람 되고
세상에서는 강한 것을 선이라 하고 무조건 이기고 보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강하고 잘난 사람은 결국에는 자기 능력만 의지하다가 무너지고 만다. 반면에 주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몸부림치고 넘어지고 실패해도 주님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마침내 그 복을 경험하는 것을 본다. 생각을 해보자. 그가 진실로 예수 믿고 변화된 성품을 가진 존재이기에 그 병든 종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였기에, 그 아픈 종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 뜻대로 살면 손해보고 억울한 것 같아도 주께서 함께 하셔서 마침내 승리케 하여 주심을 보게 된다.
선배 목사님 가운데 최선을 다해 목회를 감당하던 중에 섬기던 교회의 장로 중의 한분이 설교에 대해 자꾸만 반대의견을 표명하고 설교를 바꿀 것을 자꾸 요청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분란의 일들 없이 조용히 교회를 사임하고 나오셨다고 한다. 자녀들이 있고 생활의 염려들을 생각하면, 본인의 목회적 책임이 없는 중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렇게 결정하신 그분의 말씀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목사가 양들과 싸우며 분쟁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설교의 부분에 있어서 타협을 해야 하는데, 이 또한 목사의 양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교회를 주님께 맡기고 떠나왔는데, 이후에 나타난 결과는 훨씬 더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쪽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성품, 믿음의 시금석
혹자는 성품이 좋은걸 보면 저 사람은 타고났다 혹은 천성이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리의 천성은 모두 죄 가운데 죽어 마땅한 것이니, 좋은들 별 차이가 없다. 대부분이 후천적으로 맺어진 배움과 경험의 결과임을 생각하게 된다. 특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자가 가지는 성품의 온전한 변화는 성령 안에서 맺는 참으로 귀한 믿음의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간혹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저 권사님은 신앙은 좋은데 성질이 괴팍해.’ 괴팍하다는 말을 쉽게 설명하면 ‘거칠고 모가 났음’을 뜻하는 표현이다. 혹은 ‘저 집사님은 신앙은 좋은데 말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문장의 주어와 술어가 일치할 수 있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신앙이 좋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며 경외하는 자인데, 그런 사람의 뒤에 이와 같은 술어를 말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게 될 때에 성품과 인격의 변화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한 열매가 아홉 가지 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다. 이 아홉 가지를 한마디로 ‘성품’이라고 말한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하고 은사가 나타나고 치유의 일들이 나타나는 것도 맞는다. 그러나 성령의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으로 따라야 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품의 변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말씀하는 그 캐릭터의 온전한 변화가 있을 때에, 그 사람을 가리켜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드린 후에 무슨 회의를 하다가 그것 때문에 교회가 쑥대밭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민교회 가운데 그럴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회개와 회복이 필요하다.
신앙이 좋다는 것
우리 신앙이 좋다 라는 것, 내가 교회 권사라는 것, 내가 장로라는 것, 그 자체의 직분에서 가장 분명해야 될 게 있다면,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열매는 성품이 변하고 말하는 것이 달라지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고 얼굴에 정말 어린아이 같은 온유함이 나타나는 그런 삶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연한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어린아이 같아지는 게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연수가 더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고 새로워져서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얼굴에 사악함과 괴팍함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계속 새로워지고 젊어진다면 당연히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좋은 예수를 믿었는데 인상은 왜 바뀌지를 않는가?
사명도 성품
충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충성도 성품이다. 충성된 자를 가리켜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렇게 말한다, 착한 것하고 충성된 것이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충성 되다는 것이 내 힘으로 충성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충성되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충성도 성령의 성품이다. 그래서 불충성하는 게으름은 성령의 충만이 결여된 성품의 악함이 되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결국에는 참된 신앙인,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은 누구인가? 성품에 온전한 변화를 맞본 사람이다. 변화가 무엇인가? 씨가 떨어지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지는 그것이 변화이다. 신앙이 변한다는 것은 변해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변화되어야 될 때 변화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변질되는 것이다. 변질되면 악취가 난다. 변화되면 열매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데, 변질되면 악취가 나서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하지를 못한다.
향기와 변화의 인생
변화되어 향기나면 얼마나 좋은가? 사람마다 냄새가 있는 데,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좋은 향기는 예수 향기, 그리스도의 냄새이다. 그래서 오래 동안 예수를 믿고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그러면 젊은 집사들이 와서 기도해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정도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오면 입에서는 잠언이 나와야 한다. ‘기도하면 돼, 걱정하지 마라’ 그 한마디 말에 그냥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그런 은혜가운데 살아야 한다. 반면에 변화되어야 할 때, 변화되지 못하면 변질이 된다. 변질은 악취만 진동하게 만든다. 주변에 사람이 몰려오지 않기에, 전도의 기회도 없이 외로운 인생을 살아갈 따름이 된다.
아무리 거친 인생도, 하나님의 은혜가 붙들고 성령이 점유하고 있을 때에 한없이 부드러워지게 된다. 관용하고 이해하고 아름다운 예수 향기를 전하게 된다. 내가 의로워서 그런가? 아니다. 의로워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롭다 칭함을 받았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다. 성령 안에서 은혜로 하나님이 가려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의 가리움을 받고 그나마 성도라는 이름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불같이 뜨거운 세상
세상이 불같이 뜨겁다. 분노하고, 파괴하고, 참지 못하고, 사랑 없는 인내와 사랑 없는 평화 속에서 냉소와 미련스러움이 우리를 달구어 가는 것을 본다. 결국 모두가 무너지고 깨어지며 파괴되는 것으로 결론을 맺을 것이다. 이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이 무엇인가? 성령 안에서 온전한 변화를 이루어 주님을 초청하자. 주께서 모든 것을 복되게 하시리라.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은혜와 능력을 더하시리라.
10/05/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