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과 거룩
요단강 도하를 목전에 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요구를 말씀하신다. 당장, 저들의 생각은 오로지 요단강을 건너는 일뿐이었다. 요단강을 건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말씀을 하셔야 했다. 어쩌면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라든지 아니면 다리를 놓게 하든지, 그런 류의 답이 필요했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에게 ‘나는 너희의 성결을 원한다, 너희의 거룩을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인생의 요단강을 건너는 듯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 앞에도 직면해 있다. 결혼문제, 자녀문제, 건강문제, 사업문제 등등. 조금이라도 믿음 있는 성도들은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해결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날도 3500년전 그때나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당신이 자녀들에게 동일하게 먼저 요구하심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성결함, 바로 거룩한 존재에 대한 요구이다.
하나님의 실행원리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다. 같이 마음 아파하시며 문제와 일들을 지혜롭게 잘 감당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문제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있다. 어떤 문제의 해결보다는 그 문제를 풀어가는 우리의 존재자체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 닮은 성결과 거룩에 합당한 존재가 먼저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눈앞에 닥친 어떤 일들에 대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답을 찾는다. 직면하는 직장문제, 사업문제, 돈 문제 등에 대해 하나님께서 바로 바로 해결해주시기를 원한다. 실제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싸우시고 일하시고 모든 어려움들을 앞서 극복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전에 항상 우리에게 요구하심이 있다. 너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규정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말씀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라.’ 이 말씀 앞에 많은 염려의 문제들이 드러나 있다. 모든 염려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은 ‘염려하지 마라, 염려함으로 너의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더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그런 복된 존재가 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실행 원리이다.
주님앞에 자신을 규정
어떤 성도가 가까운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는 땡전 한푼 없이 먹고 살기위해 낯선 도시로 혈혈단신 이사를 왔다. 먹고 살 것이 제대로 없어서 교회에서 잠을 청했다. 일자리를 찾았는데, 신통한 일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힘들다고 말하는, 자정 무렵 도넛 반죽을 하러 출근을 했다가 새벽이면 주인에게 맡기고 퇴근하는 힘들고 고단한 일거리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작은 수입이 생겨 조그마한 원베드 아파트도 얻게 되었다. 그런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에게 물질적 피해를 입힌 그 인생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다가 교회 새벽기도를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회를 와도 밤낮을 바꾸어 일을 하다 보니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기도도 제대로 못하고 잠들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통성 기도소리가 왕왕 울려오는데 나중에는 환청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사기를 친 그 사기꾼에 대한 미움이 얼마나 컸던지, 주여 삼창하는 소리가 죽여, 죽여, 죽여라는 소리로 변해서 들리더라는 것이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 채로,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의 고통으로 몸은 야위어가고, 그럼에도 꾸준히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새벽에 교회를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에서 새벽기도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말씀이 그에게 터치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기도를 하는데, 예전 같으면 기도를 하고자 눈을 감으면 늘 기도를 방해하던 그 원수 같은 사기꾼이 보였는데, 그 사기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몰골이 앙상한 자신과 그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주님이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그 영혼의 핍절한 모습을 바라보는 주님을 보면서 한없이 자신도 울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주님의 눈으로 자신의 앙상한 영혼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그치지를 않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불쑥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주님보다 더 억울한 분이 어디 계시겠는가? 주님보다 더 고통당하신 분이 어디 계시는가? 그렇게 주님의 마음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원수 같은 인생을 자신의 힘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나타난 현상이 무엇인가? 그의 삶에 드러난 회복이었다. 비로소 그는 단잠을 이루게 되었고, 자신에게 이리저리 얽힌 재정적 문제도 하나둘씩 극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주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간증이다.
공동체의 갈등과 고통
개인의 문제 뿐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많은 문제를 바라보고 대하는 신자의 관점도 동일하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복잡하다. 고집스럽게 나눠진 그 분열은 치유불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들려오는 소식들을 보면, 좌와 우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날카롭게 서로가 자신의 생각을 따라 첨예하게 나뉘어 전쟁같이 공격하는 것을 본다. 나뉘어져도 건설적인 일들을 균형있게 한다면 얼마나 유익할까? 그러나 지금은 기준도 없이 자신의 당파적 이익만을 위해서 거짓을 향해 달려간다. 한쪽이 죽어야 끝이 날 듯 하다. 더 이상 같은 국민, 같은 나라라고 보기 어려운 느낌도 가지게 된다. 위정자들이 그러하니 결국 그 모든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국민들은 이리저리 찢긴 채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대통령은 가정으로 치면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을 돌아보고 먹을 양식을 공급하며 가족들을 잘 양육하고 부양하는 아버지의 역할일 것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하는 일들이 너무 많은 것을 찢고 갈리게 만드는 것을 본다. 어떤 정당한 이유에서든지, 분쟁하고 나눠지면 황폐케 되고, 나라를 온전히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신자와 기독공동체 교회는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가? 교계의 입장들이 천차만별이다. 교계에서는 현실정치에 대한 언급은 인권, 평화 등 보편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것 외에는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교계가 어느 특정 정당의 주장을 편들거나 심지어 무슨 기독교정당을 만들어 정계에 진출하려는 도모 등은 지극히 위험할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독립투사와 같은 예수를 원했는데, 예수는 그 바람과 전혀 달리 철저하게 억눌린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에게 관심을 두었고, 천국복음을 선포함으로 하늘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 땅의 권세와 문제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도록 복음으로 인도하셨다.
무엇이 먼저인가?
세상을 향한 신자와 기독공동체에 주시는 주님의 뜻은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 우선하여 하늘 천국백성의 존재됨이 먼저라는 것이다. 주님의 공생애 말기에, 죄악된 인생들은 천국복음을 듣고 삶의 근본 뿌리의 변화를 잊어버린 채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에 예수를 맞추고자 하였다. 자신들이 그토록 따르던 그 예수는 이제 죽음을 예언하게 되었다. 그러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찬양하던 그 입술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조각을 먹었던 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같은 입으로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메시아를 배척한 것이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인생이 온전하여질 수 없다. 하나님나라의 그 백성으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회복의 시작
회복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을 때 드러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분주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다. 격랑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여차하면 쉽게 떠내려가 버리고 말 것이다. 풍랑 중에 노 저어 항해하는 사공의 치열함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야, 주님 주신 한때를 복되고 아름답게 살았노라 말할 수 있을까? 늘 주님 앞에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고 답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온전함의 자리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답에 일치하는 삶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시대를 넘어서서 거룩을 지키는 것이다. 세상 앞에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구별된 존재로 서는 것이다.
삶의 문제들은 항상 변화무쌍하게 다가온다.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허물고자 하는 것이다. 연약한 우리 인생은 그런 모든 문제에 일일이 답할 능력도, 답할 필요도 없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신앙으로 주 앞에서 거룩함의 존재의미를 찾는 것이다.
09/2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