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거룩

- 종교의 타락, 죄 문화, 방종의 자유 -
전남수 목사

석달 전, 바울의 선교여정을 따라 터키와 그리스의 교회들과 유적지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지진 등의 피해로 무너진 것을 관광지로 개발되는 과정 중에 있지만, 교회가 위치한 곳들은 대부분 화려한 도시의 위용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수 천년 전임에도 당대의 화려한 건축물들과 그 속에 담겨진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들이 함께 했던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 시대에 지금 사용해도 괜찮을 정도의 도로들과 건축물들, 그리고 그 상상력에 의한 예술작품들을 볼 때 인간의 능력들이란 정말 하나님의 오묘한 작품임을 확인하게 된다.

 

종교적 거룩과 타락

 

그러나 그런 도시문명과 더불어 보게 되는 것은, 마치 에덴동산의 하나님의 선물 같은 축복들 속에서도, 그 많은 좋은 것들을 두고서도 구태여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의 죄성들이 그때 그곳에서도 천연히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그 화려한 문명을 이루는 지혜와 기술 사이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우매함과 죄악들도 함께 본 것이다. 종교적인 열심에 의해 세워진 신전들의 화려한 모습 바로 이면에 인간의 죄성이 적나라하게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신적 존재에 대한 감각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거룩을 이룰 종교적 형상들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그 우상의 형상들 앞에 절하고 섬기면서, 나름 죄인의 굴레를 벗어난 꽤 괜찮은 피조물로 자신들을 단장했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의 본성은 무엇으로도 죄성의 DNA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장 거룩한 종교라는 양식도, 겉으로는 모든 신적 세계를 다루면서 하늘의 피안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그 속내는 여전히 죄악의 혼합들이었다. 죄악과의 교묘한 동침이었다. 화려한 신전의 건축물들 가까이에 창녀굴과 음란문화가 같이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어떤 이방신전은 성전 뒷방이 신전 제사 후에 창기들과의 혼잡한 일을 행하는 통로로 연결되어있음도 볼 수 있었다.

 

종교의 타락, 인간의 방종 

 

바울은 교회를 향한 그의 서신들에서 이런 영향들을 언급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참된 거룩함만을 좇을 것을 말한다. 또한 거룩함을 좇는 동등한 위치에 가장 우선적인 문제로 저들의 음란의 문제를 강력하게 지적한다. 초대교회 당시에 음란의 문제가 엄청나게 교회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금번 성지순례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의 이방신전의 종교적 행위 속에 음행의 일들이 깊이 수반되었음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어떤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종교의 거룩성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 있는 신뢰가, 종교의 죄악된 행위에 대해서 바른 판단을 저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란의 문제와 같은 옳지 못함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쉽게 용인됨으로, 그 옳지 못함 자체가 가지는 오류와 잘못들이 희석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어쩌면 종교가 가진 자연스런 문화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신전에서 행해지는 악한 행위들은 일반 사람들의 삶속에 충분한 방종의 자유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종교문화와 구별된 성도

 

바울은 그런 도시 문화들 속에서, 죄에 대해 배우고 익혔음에도 감각 없이 행하는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저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견책하는 것이다. 단호하게 거룩함을 쫓으라고 말한다. 어느 서신서에서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방신전의 타락이 종교 문화라는 관점에서 관용될 때,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교회성도들에게도 분명히 영향을 끼치고, 성도답지 못한 방종의 삶에 엄청난 자유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교회가 시작될 즈음에 기독교가 가지는 성경적 가르침들이 문화로 형성되기 전에 저들은 이미 구원 얻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방종을 행한 것이다. 그만큼 종교가 가지는 영적 도덕적 타락은 사회에 깊은 영향력들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가운데 데살로니가교회가 받은 영향력들은 이미 영적실패가 삶의 실패로 그 열매들이 맺혔음을 본다. 생활 속에서 그런 종교가 허용하는 문화들을 성도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자기의 아내를 버리고 분수와 경계의 선을 넘어서 색욕의 파토스 즉 강한 욕망을 쫓는데 이미 저들이 혈안이 되어있었다는 것을 바울은 지적한다. 교회와 성도의 전적인 타락과 실패를 의미한다. 종교의 타락이 사회와 사람들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성도들마저도 그런 문화의 영향권에서 피할 수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종교와 같은 인터넷 문화

 

오늘날 이 시대에도 동일한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다. 인터넷 문화가 마치 거대한 신전의 종교문화처럼 잠시라도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우리 삶을 지배하는 도구가 된 것을 본다. 그 자그마한 기계에서 생성된 정보들이 거를 틈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찾아온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린다. 정보의 선악에 대한 판단 감각을 가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몸이 이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러한 무감각이 성경적인 삶의 원리에 대한 고찰도 없이 우리들이 가진 죄성의 DNA가 원하는 쪽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한국을 방문해서 필요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큰 도시와 작은 도시 할 것 없이 시골 구석구석까지 음란한 퇴폐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쉴만한 숙소를 발견하기가 너무 어렵다. 찾고 찾지 않으면 아주 비싼 도심의 호텔이 아니고서는 편안하게 쉴 곳이 없다. 

혼전 젊은 남녀 대학생이 몇박몇일의 여행을 함께 떠나는 데도, 교회 중직인 부모의 변론이란 것이 ‘요즘 세상에 그게 뭐 그리 흉이 될 게 있나요?’라는 것이다. 이혼에 대해서도 너무나 개방적인 것을 본다. 당당하게 이혼하고 돌아왔음을 거침없이 말하고 사람들은 축하의 말을 던진다. 사람의 삶이 녹록치 않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침없음이 자녀와 주변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긍정적이지 못하다. 

 

교회-사람들-방종 

 

타락하고 음란한 이 시대 가운데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교회의 역할을 생각하다보면, 결국은 사람의 문제임을 알게 한다. 유명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태들이 교회가 주는 영향 그 이상의 영향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더라는 것이다. 유명 크리스천의 일탈적인 행위, 유명 기독 정치인의 몰락, 신불신간의 존경받던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 등이 일반 성도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유명한 축구대표팀 감독을 기억한다. 그는 온 국민이 지켜보는 축구경기에서 세상이 뭐라고 하던 기도하던 사람이다. 그의 자녀들도 방송에서 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자녀들이 온 몸에 문신을 하고 방송에 등장한다. 자녀 가운데 혼전자녀를 유명 여배우의 사이에 가져 매스컴을 탔다. 자식문제에 누가 큰 소리 할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의 인터뷰 내용은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만사를 축복과 환영하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에 조금 겸손한 목소리로,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더 기도하지 못함을 고백했다면 세상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쳤을까? 죄가 큰 것이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함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후 그를 존경하던 어떤 이들 가운데는 그것마저도 관용된 문화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최근 한국의 모 의원이 죽음을 선택했다. 영안실의 그의 죽음 앞에는 안수집사 모씨의 이름이 직함과 함께 적혀있었다. 3선의원이면 10년 이상 국회의원을 했었고, 명문대학 출신에 고시를 패스하고, 대통령을 배출한 1등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형편에 대해 인간적인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정치적 상처와 아픔이 주요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 많은 사람들은 그 붉은 십자가와 직분을 보면서 예수신앙이 과연 그 정치적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한다. 망자에 대해 무엇이라 하기는 예가 아닌 듯하여도, 그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이들과 가족들에게, 오히려 죽을힘으로 살아서 예수신앙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바램 때문이다. 그 붉은 십자가와 직분이 보기에 무색하다. 

또한 한류문화가 최정상을 달리는 즈음에 공중파에서 신앙을 말하던 스타가 주당이라고 술자리 경험담을 소개한다. 그가 음주 경험담을 늘어놓는다. 예전 같으면 하나님 영광위해서라도 사양했을 일들도, 돈을 주고 인기를 누리게 한다면, 프로그램이 선정적이던 퇴폐적이던 상관이 없다. 돈이라면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 사람이 기독교 방송의 간증자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원래 신앙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믿음 때문에 가지는 것이지 결코 이 땅의 삶과는 별개라는 그릇된 생각을 심어주지 않기를 바란다.

 

종교- 문화-의식

 

종교와 문화가 사람들의 의식과 판단에 큰 영향을 끼친다. 과거 신전문화의 퇴폐성이, 당시의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성문화를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했고, 당시 같은 시대를 살아가던 성도들에게는 신앙과 별개로 정욕을 좇는 방종의 삶도 허용하는 일에 기여했다. 오늘날 교회와 신전은 비교불가한 일이지만 교회와 성도의 삶, 특별히 앞선 지도자 혹은 기독교를 드러내는 삶을 사는 이들은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자신만의 삶이 아니다. 자신만의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런 세상 문화 속에 묻혀 자신의 택한 영혼들이 타락하는 것을 결코 두고 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분명히 진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07.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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