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와 부흥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배를 위해 나아옴에 있어서 성경을 들고 오지 않는다. 전화기를 들고 쉽게 성경을 펼친다. 빈손으로 예물 없이 나아온다. 헌금은 설교를 마치고 나면 각자의 전화기속 은행 앱을 열어서 보낸다. 그날 감정과 기분을 따라 헌금액수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은혜 받은 마음이 없으면 헌금이 없을 수도 있는가? 신앙의 퇴락을 증거하는 일들이다. 소리 내어 기도할 줄 모른다. 꼭 소리 내어 기도할 필요가 있나?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기도소리가 조용한 성도, 교회를 가보라. 저들 가운데 영적침체의 어둠이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영적싸움에서 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세상을 깨우고 회복시키는 전도는 더욱 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전도는 세상을 깨우고 회복시키는 사명의 최우선 명령이다. 부흥을 말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쳐야 한다. 끊임없이 교회는 부흥을 말하고 이를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밤낮으로 목회자의 소원, 교회를 섬기는 성도의 소원은 부흥이어야 한다. 부흥을 맛보았는가? 부흥을 맛본 사람들은 그 맛을 안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여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데, 그 향기와 맛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으로 드러난다.
그 부흥의 비결이 무엇인가? 단순한 성경의 원리가 있다. ‘모이면 예배하고, 흩어지면 전도한다’이다. 예배와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니다. 예배가 온전하게 회복되면 전도는 당연히 된다. 여러 가지 전도법을 가르치지만 방법론이 중요하지 않다. 전도는 성령의 역사이지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는 기술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로 나타나고, 교회를 사랑하면 전도로 나타난다.
골방의 은혜, 세상의 복음
사람의 생각으로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기술적인 전도방법을 내놓지만 그보다 전도자의 신앙상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건물이 전도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영적실력이 있는 교회라면 건물은 다음 순서이다. 오히려 영적 실력없이 쌓아올린 건물은 복음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영적인 은혜를 받았는가? 저들은 골방에서 받은 은혜를 세상을 향해 가지고 간다. 은혜를 경험한 이들은 한결같이 은혜 받은 즉시 사람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를 만났다”, “와보라” 하였다. 그리고 저들이 전한 그 복음이 마침내 성과 시내를 소란케 하며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어왔다.
그러므로 전도는 철저하게 성도의 신앙의 열매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관계전도 혹은 인격전도 등의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전도의 본래적 원리는 듣는 즉시, 은혜를 받는 즉시 세상으로 나아가서 전하는 직접전도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정이 우리 조국과 세계 열방의 선교지들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바꾸어온 것이다. 그러한 직접 전도의 방법은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순종차원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덧입혀져서, 세상을 진동케 하는 능력이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회복, 전도의 회복.
전도는 사명에 대한 명령과 복종이다. 주의 음성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이 전도의 시작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에 즉시 복종했다.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보혜사 성령이 임하였던 자리에 함께 있는 120문도 모두는 전도 전선에 내 몰리게 되었다. 강제성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들 앞에 죽음이 있다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기쁨을 이길 수가 없었기에 순교까지 하지 않았는가?
은혜가 없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전도의 방법을 찾는다. 전도 왕이라고 해서 간증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별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예수님 믿으세요, 교회 갑시다” 하며 손을 끌었더니 따라 오더라고들 한다. 성령과 믿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환상
즉각순종의 형태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 중 하나가 ‘고상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환상의 유혹’이다. 복음을 가로막고 말씀대로 입을 열어 전하는 증인의 삶을 방해하며 전도하지 않는 삶을 그럴 듯하게 합리화 시킨다. 입으로 예수를 전하는 것을 무식한 방법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말보다 행위로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행위의 선함이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기쁘게 자랑하고 고백하는 것에 비례해서 인격과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것이지 우리가 행하는 선한행위의 완전함으로 상대방을 복음에 굴복케 하겠다는 생각은 굉장한 교만이며 무모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관점들이 사도들이 당시에 ‘예수를 그리스도’ 라고 하는 증거 했던 역사를 다시 회복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핑계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성경적인 전도는 단지 ‘익은 곡식을 찾는 것’이다. 전도가 사람의 기술로 전락해 버렸음을 많은 전도지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전도는 ‘나의 신앙고백이며 나의 신앙의 간증’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는 내가 만난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일 따름이다. 어렵지 않다. 주님은 이와 같이 가장 단순하고 쉬운, 많은 배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누구나 입을 열어 전하는 복음이 세상을 진동케 한 것이다. 한 가지 은혜 받음을 통해, 성령의 강권하시는 능력에 순종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당신의 일을 이루어 오신 것이다.
세상의 빛, 전도
전도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최고의 등불을 밝히 켜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이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세상에 전도하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이것이 천하를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 전도가 무엇인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기에 천하를 얻는 일보다 더 큰 일이기도 한 것이다. 성도들이 큰 명예를 얻거나 큰 업적을 남길 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전도를 통해서 얻은 그 영혼의 열매는 천하를 얻음 같은 복을 받을 것이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귀하게 보신다. 더불어 그 한 영혼 한 영혼이 전도의 사명자가 되어 이 땅의 부흥을 이루어가기를 소원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나 니고데모나 12제자를 부르실 때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시고 전도하셨다. 이렇게 전도하신 이유는 인격은 개별적이며 복음은 개인이 받는 것이며 생명은 개인 하나 하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양 일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 목자가 아흔 아홉은 우리에게 있는데 한 마리를 잊어버리면 그것을 찾아다니다가 찾으면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전도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양 일백 마리도 하나하나가 모여서 된 것이다. 천만이 있어도 그중에 하나가 없으면 전체가 없는 것과 같이 개인전도도 개개인에게 전한 예수님이 쓰시던 전도방법이다.
“와보라” 하고 초청하면 초정 받아 오는 자는 반드시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진리가 되시는 주님을 발견하고 그 만난 감격을 억제할 수 없어 “내가 메시야를 보았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그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면서 이 기쁘고 벅찬 감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형제에게 “우리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하게 된다. 또한 “나를 좇으라”하시며 개인 전도를 하셨고 “와 보라” 초청하시며 개인 전도를 하셨다. 전도는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도다”(롬10:14-15)하셨다.
원색적 복음, 세상의 변혁
복음전도의 일들이 원색적일수록, 세상은 핍박과 고통을 준다. 그러나 인내의 시간이 지나면, 그 한 영혼을 향한 복음 전도의 열매가 얼마나 아름답게 맺혀지는지 모른다. 전도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변혁시키는 가장 완전하고 복된 부르짖음이다. 전도는 성도의 열매이므로 열매를 얻기 위한 힘씀이 있어야 한다. 전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성회와 잔치를 벌려야 한다. 사람들의 귀에 전해지도록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예수복음이 세상의 빛이고 소망임을 확신가운데 전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크고 아름답게 세상을 섬기는 일은 없다. 수많은 구제와 봉사보다 한마디의 복음을 전하라. 원색적 복음을 전하라. 세상의 변혁을 가져올 것이다.
06.08.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