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이 분명한 가정

- 예배회복, 가정회복
전남수 목사

기본이 분명한 인생

 

집안형편이 가난해도 한결같은 가정들이 있다. 저들의 가정은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미래가 있어 보인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자녀들은 어린 감람나무들 같다. 비록 지금은 어리고 약하게 보여도, 장차 기름 등불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밝힐 수 있는 귀한 재목이 될 가능성이 보인다. 어른이나 아이나. 그 가정 가운데는 저들이 지키는 불문율 같은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을 본다. 아이들도 부모의 눈치만을 기준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저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순종해야 될 어떤 기준에 의해서 행동들을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본다.

손님이 오면 아이들이 어려도,빈들의 망아지처럼 뛰어다니지 않는다. 가난한 집인데도 아이들 표정이 밝고 명랑하다. 손님이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인사를 한 뒤에 자기 일을 한다. 함께 식사를 할 때도 먼저 숟가락을 들지 않고 반찬을 편식하듯이 집중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아이들 스스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몸에 밴 애들이 있는 그런 집들이 있다.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들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좋고 부러운지 모른다. 이런 집을 뭐라고 표현하는가? 보통 사람들은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말한다. 비록 가난하여도 저들은 지킬 것을 지키는 가정이고 가문이다. 기본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집안을 보면, 비록 형편이 어려워 보여도 그런 가문의 애를 데려다 며느리삼고 싶고 사위삼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든다. 돈이 없다 뿐이지, 진짜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가정이기에 그러하다. 

오늘날 조그만 일에도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어릴 적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가 원망거리가 되어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이 있다. 부모 자식 간에 불화하고, 그 형제간에도 원수가 되는 그런 집들을 본다. 부모 없이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있을 것인가? 스스로 기저귀 갈아입고, 우유병에 밥만 들어 먹으며 자란 그런 인생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여도,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그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그런 부모를 향해 자신의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았다고 평생 원망의 존재로 규정하고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엉터리 같은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더불어 그런 크리스천 가정이 있고, 신앙인이 있다면 과연 저들의 인생에 복이 있을 것인가? 가장 먼저 스스로 그 인생을 부정하는 모습 속에, 평생의 삶이 억울하고 원통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젊어서는 부모를 원망하고, 늙어서는 자식을 원망하는, 그래서 일평생 그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지 않는 불행한 존재가 될 따름이다.      

 

가정의 아름다움-참된 예배

가정의 영적인 기본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도, 구성원 각자의 삶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본기를 갖추었을 때,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이 주시는 합당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의 일들인가? 그것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의 성공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좀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예배가 온전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가문을 축복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가정들을 세우시고 원하시는 것, 참된 예배자의 가정, 그것은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움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 가령 예를 들면, 옛날에는 헌금도 다림질을 해서 정성을 다해 드리도록 가르쳤다. 오늘날에는 대체 그런 미신 같은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런 율법적인 생각들을 없애야 한다는 어른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 애들은 새해가 되면 교회어르신들에게 단체 세배를 한다. 교회에서는 미리 어르신들에게 은행에서 빳빳한 돈을 모아서 세배돈 봉투를 만들어 드린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것을 받으면서 하는 말들이 있다. ‘이건 새돈이니까, 헌금하기 위해 따로 떼놔야 되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그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이상한 것 잘못 가르쳤다고 혼을 내실는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기준이 훈련된 가정

 

기준을 가지고 가르치고 그 가르침의 훈련이 꾸준히 반복할 때 그 교훈들은 아이들의 뼈속 깊이 새겨진다. 저들로 말미암아 가정에 하나님의 주시는 복과 미래가 있다. 

중요한 것은 기준이 명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예배이다. 하나님이 인생과 가정과 민족의 복을 위해 세우신 기준이 예배이다. 

열왕기서의 왕들의 역사를 쭉 살펴보라. 

택한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축복해 주셨는가? 선민이니까 무조건 내 새끼 하고 그냥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러셨는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왕들이 앞장 서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백성들이 그 우상 앞에 엎드리니까,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조공 바치던 별것 아니었던 갈대아 사람들을 강성하게 일으켜, 바벨론 대 제국을 만들게 하고서 저들을 징계하시는 것을 본다. 

그러나 예배가 온전하고 하나님 잘 섬기던 다윗의 시대를 보라. 그의 예배가 온전하였을 때, 다윗시대에는 주변나라가 일어서지를 못한다. 하나님이 눌러버리는 것을 본다. 그러나 예배가 시시해지고 영적으로 약해지고 하나님 섬기는 게 초라하기 짝이 없으면 어떻게 되었던가? 별 것 아닌 나라들이 눈앞에 나타나서 대적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주변에 도둑놈 사기꾼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세겜에서의 야곱의 가정처럼 어려움들이 찾아오고, 그 어려움들이 더한 재앙을 가져오는 것을 본다. 그때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왜 내 주변에 도둑놈 사기꾼들이 많을까? 왜 우리 가정에 온전한 회복의 일들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가장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아야 한다. 나의 예배가 실패되고, 나의 신앙 없음이 우리 가정과 자신에게 어려움을 부르고 조장한 것은 아닌 지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배드림-온전한 가정

우리의 가정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가? 예배 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하심은, 네가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사랑하고 예배하느냐? 하는 것이다. 보통 우리들의 경제형편이 좋은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단할 때, 개스값을 기준해서 볼 때가 많다. 개스값이 올라가면 삶이 어렵겠네 하고, 그 값이 떨어지면 살기가 좀 나을 것이라고 보통 말한다. 그러나 사실, 돈 있는 사람에게는 개스값이 올라가나 내려가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신앙이 때로는 업앤다운 한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요동을 친다. 가정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 금방 망할 것처럼 이리저리 쉽게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눔의 아픔을 겪기도 한다. 왜 그런가? 인생이 가지는 영적인 파워가 없기에 그러하다. 영적인 힘이 있는 사람은 삶의 고난과 어려움에도 요동함이 없을 것이다. 

고난 앞에 왜 호들갑을 떠는가? 믿음으로 표현되는 영적인 힘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파라과이의 개미는 작은 야자열매만 떨어져도, 천지가 개벽했다고 난리를 친다. 우리가 개미같이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늘 인생이 큰일로 요동을 치고 난리를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있는 교회는 항상 큰 일이 생산될 것이며, 교회가 은혜가운데 잔잔할 일이 없을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결국은 부부, 부모와 자식, 자녀들 간에 믿음의 영적은혜가 크고 굵게 자리하고 있어야 온전한 가정을 이루며,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다. 그 중심에 예배가 있다. 교회에서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가 그의 심령과 가정을 온전케 할 것이며, 바위같이 단단한 영적인 힘으로 인해 거친 풍랑의 어려움가운데서도 그 가정은 복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가정의 연약함을 회복하고자 할 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울어야 된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말씀 앞에 자기를 항복시키는 것이다. 가정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불충을 주님 앞에 회개의 기도로 올려드려야 한다. 순종이 안 되면 복종을 해서라도 나아와야 한다. 

예배가 회복될 때, 교회생활이 분명해질 때, 설교가 온전히 심령에 젖어들 때, 은혜가운데 주시는 영적인 힘들이 회복을 가능케 한다. 그 영적인 힘은 삶의 고단함들과 어려움들을 제어하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가정을 살리는 능력이 된다. 깨어짐과 상처의 흔적이 많은 이 세대의 가정들 가운데, 온전함과 회복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05.2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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