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바른 태도

- 청지기, 성실, 충성, 복음
전남수 목사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세상에 본질적으로 우리의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애써서 모은 것은 단지 살아 숨 쉬는 동안 위탁을 받은 것뿐이며, 우리는 그저 청지기일 따름인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청지기로 태어났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충성된 청지기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세상을 주관하는 철학

세상이 말하는 소유에 대한 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곧 막스주의와 함께 사회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는 세상의 모든 부는 노동이나 지식을 동원하여 그것을 모은 사람의 소유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기 소유에 대한 이름을 새기고 내 것임을 나타내는 행세를 한다. 막스주의는 그것을 천만의 말씀이라고 거부하며, 세상의 부는 당연히 모든 사회의 공적인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누가 더 많이 벌어 들였을지라도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 민주주의는 이 둘을 접목한 형태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장 바람직한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혹자는 자본주의도 막스주의도 결국은 사회 민주주의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성경은 과연 이러한 세상 철학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이들 중 그 어떤 것을 지지하거나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없다. 아주 단순하게 선언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선포할 따름이다. 하나님은 돈을 받고서 그 권리를 양도하신 적이 없으시다. 누구에게 거저 주신 적도 없다.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으며, 원하는 대로 그것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며 착각이다. 신자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믿는다. 이 점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이다. 

 

죄성이 간과된 꿈과 소망

그러면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는데, 하나님은 이에 대해 분명한 경고를 내리신다. 그 증거가 이 세대에 나타나고 있다. 막스주의의 종주국은 러시아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의 지상 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가기도 전에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우선 먹고살기에 급급하여 공산당을 해체하고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선 것이다. 중국 역시 자본주의 개방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북한 역시 일부지역을 개방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답습하고 있으며, 결국 고립된 체제로는 버틸 수 없어서 베트남식 자본주의 모델을 취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과연 월등한 철학일까? 그렇지 못하다. 자본주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경제의 업&다운에 의해서 세계 경제는 동일한 몸살을 앓게 됨을 본다. 미국 대통령의 SNS상의 한마디가 중국의 증시를 뒤흔들어 놓는 것을 본다. 사람들이 가지는 이익에 대한 추구가 국가에 의해 최대화되기를 소원하지만, 인간이 가지는 죄성이 간과된 채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려던 이상적인 소유의 개념은 그저 꿈같은 일일 따름이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그 죄성을 씻고 빚어지지 않고서는, 결국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될지 몰라도 이 땅의 소유에 목을 맨 세상 사람과 그렇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종말세상과 소유

종말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자가 소유의 문제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가질 생각은 우리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만이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앞으로 일어날 세상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종말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와 모든 소유에 대한 재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누가 충실한 청지기였느냐 하는 심판과 함께, 잘했다 칭찬 받는 종에게 하나님은 그 소유를 재 위탁하는 포상의 날로 축복해 주실 것이다.

 

청지기로서 존재방식

선한 청지기로서 이 땅에 존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다. 시간과 재물, 달란트와 일, 심지어 자녀까지도 맡기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만물의 소유주이신 주님의 뜻대로 사용되고 관리되어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유물을 자기 것처럼 함부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직분을 망각하고 소홀히 여겨 하나님의 소유를 마치 내 것처럼 사용한다. 자녀를 자기의 소유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시간도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소유물이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 소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소유로 주님을 섬기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장차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더 많은 소유로 그들에게 맡겨주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종의 처신이 요구된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실함으로

구약 창세기에 언급되고 있는 어린 요셉은 형들에게 팔림을 당하여 아버지 집을 멀리 떠난다. 아무도 그를 아껴주는 사람이 없고 돌보는 사람이 없다. 뼈저린 노동과 수고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바뀐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을 다한다. 그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으나 과감하게 거절하다가 그 결과 옥에 갇히게 된다. 그의 성실함과 정직한 삶은 오히려 전보다 더 나쁜 환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성실을 다할 뿐이다. 감옥에서도 신뢰를 받았으며 간수의 일을 대신하다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그의 삶을 한결같이 관통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함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형편, 환경을 떠나 하나님의 눈앞에서 한결같음이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 주님의 이야기이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 가난과 수고로 찌든 삶을 살으셨다. 성실을 다하여 하나님아버지께 충성하고 백성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자들의 충동질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그 주님을 십자가에서 못박게 되고, 주님은 사람이 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무덤에 묻히셨다. 그러나 주님은 사망의 결박을 풀고 성경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만유를 다스리게 되셨다. 이러한 주님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생애는 곧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처럼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그 삶을 이루어가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가운데서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의 한결같은 성실을 구해야 할 것이다. 

 

충성됨으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다. 성경이 계시하는 충성이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하게 하는 것이며,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경우, 하나님께서 충성된 자를 살펴 함께 거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며,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충성은 자기 생활에 매이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생활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충성은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기쁨을 내려놓고, 즉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부르신 주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다. 

충성은 즉각적인 순종의 의미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합당한 자세가 아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게 되면 점차 누적되고 쌓여서 나중에는 과로를 하게 되고 결국 건강을 해침으로 병이 들게 될 것이다. 

애초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피로가 쌓이고 누적되어 병을 얻었다면 주님의 위로가 있을 터이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을 제쳐두고 방탕, 나태, 게으름, 방종한 삶에 젖어 살았다면 책망뿐이 없다. 주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소임을 망각한 채 세상에 빠져 살아간다면 그에 대한 대가는 엄중한 진노만 있게 될 것이다.  

 

복음과 관계됨으로 

성경은 종말시대에 주인께로부터 맡겨진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함이 타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며 또한 불변하는 진리이다. 이 말씀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이 땅에서 머물도록 유보한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며, 이를 위해 의미있는 인생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 이 땅에서 각기 다양한 일을 하고, 다양한 인생을 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복음과 상관있는 일이 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종말시대에, 어떤 상황과 현상에 머문다하여도 한결같은 비전과 소망은 한가지이다.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 벽돌 한 장이라도 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행하는 일과 그의 위치와 존재는 복된 것일 수밖에 없다. 

주님은 곧 다시 오신다. 도적 같이 오신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서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깨어 있어 경각심을 가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 진정어린 성도의 모습이다. 

 

복잡한 세상, 단순한 삶

세상이 복잡한 만큼, 성도의 삶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상담을 하여도, 들으려하기 보다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이 너무 많아서 전혀 그 마음속 깊은 데 까지 전달되지 못함을 본다. 그러다보니 정말 소견대로 행하는 신 사사시대의 정점을 사는 것처럼 혼탁한 세태를 본다. 그럴수록 참된 성도는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찾으실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날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모두가 서게 될 것이며, 이 짧고 유한한 인생의 모습을 통해 영원한 상급과 칭찬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성실함으로, 충성됨으로, 복음과 연관되어 살아감으로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릴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05.1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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