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주님의 참된 제자

-무익함과 부족함, 겸손한 은혜
전남수 목사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

참된 주님의 제자는 삶의 방향이 분명하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지금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물건을 쇼핑하듯이 일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원리와 비슷하다. 영적생활에서는 백전백패이다. 하나님의 계산법이 따로 있음에도, 세상의 기준만으로 판단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기준으로, 자기중심에서 신앙의 내용과 행태를 결정한다. 소비자 중심주의 신앙행태이며, 삶의 적극적인 헌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부분이 적당주의 혹은 현상유지의 신앙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세대 가운데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보다 자기 생각, 자기 일을 내려놓고 열심히 따라가는 이들이다. 어느 분야든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첩경이 그 분야의 권위자를 잘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박사학위를 받는 첫째 조건이 무엇인가? 처음부터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된다. 논문의 기초는 자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필이나 감상문이 된다. 근거 있는 남의 말로 시작하는 것이 논문이다. 논문을 쓸 때 내 말을 내려놓고, 계속 남의 말을 근거 있게 인용하며 따라간다. 그런데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거기에 뭘 하나가 더 붙여주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박사이다. 내가 이미 가진 지식으로 박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빨리 받아들여 흡수하고 체화하고 익히고, 그 위에 새로운 자기의 견해를 주장할 때 박사가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 자체를 미화함이 아니라 잘 배움의 제자도를 말하기 위함이다.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제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 중에 특별히 12명을 세우는 내용을 살피다보면, 특별한 생각이 든다. 제자들 열둘을 하나같이 뜯어보아도 별로 잘난 사람이 없다. 기껏 좀 배운 사람을 꼽는다면, 세리의 직업을 가졌던 마태인데, 그도 실제 위치는 유대사회의 공적으로서 ‘왕따’에 다름 아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유대사회의 전도 대망한 젊은이들을 주님은 외면하셨을까? 실제로 바울같이 잘 나가던 사람 몇 명만 잘 변화시켰다면 복음의 확장성과 그 열매란 이루 말할 수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당연한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논리에 불과한 것일 뿐 주님이 행하신 일들의 비밀을 볼 때는 우문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왜 주님은 그렇게 해야만 했는가? 먼저는 그의 오신 목적이 그를 그렇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의원으로서 마음과 육신에 병든 자를 구하시기 위함이었다. 병들고 힘없고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같은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이 열려 있음을 알기에, 그의 사역의 모든 목적은 당연히 그런 존재들 속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실제적인 이유에서이다. 왜 주님은 예루살렘 도시의 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강원도 철원군 갈릴리 촌사람들을 사용하셨나 하는 것이다. 그것은 머리속에 세상의 생각이 꽉 찬 사람보다 선입견 없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부족함을 알기에 기꺼이 변화하려는 사람들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는 그 자세와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없는 공동체

이러한 전제가운데 참된 제자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더불어 제자들의 모임인 교회의 본질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제자로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그의 부르심의 내용처럼 우리자신도 별수 없는 인생이라는 자각을 쉬지 않는 것이다. 주안에서 성도의 만남이 무슨 자격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온전히 세우게 된다. 여기서 출발하면 교회는 결코 교만하지 않을 것이며 은혜가 깊어지는 삶을 체험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서로를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께 멀어질까봐 늘 영적긴장감을 가질 것이다. 

주님이 부르셔서 모였는데, 모여 보니 서로 별 것 아닌 인생, 그저 주님이 부르셨기에 우리가 모여 교회를 이룬다고 할 때, 그 자체가 아름답고 좋은 교회를 세우는 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배운 것, 가진 것과 상관없이 주님을 제일 앞세우며 삶의 우선순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세상에 교회 같은 그런 공동체가 어디에 있을까? 세상이 말하는 차별의 기준을 그대로 가진 채로도 그 모든 세상의 차별조건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로 묶여지는 곳이 교회이다. 그 교회를 세우는 이들이 바로 참된 제자들이다.  

 

부족함에도 주를 따르는 제자  

전도를 위해 사람을 만나다보면, 흔히 듣게 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예수 믿는 사람 인격이 문제다. 예수 믿는다면서 어째 저럴 수가 있나‘라는 말이다. 듣다가, 당장에라도 ’그렇게 말씀하는 당신인격은 어떻소. 그대보다는 아마 나을 거요. 최소한 당신이 가진 인격적 잣대에다가 우린 하나 더 하고 있지 않소’라고 말하고 싶지만, 목사라는 인격 때문에 참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인격적으로 완전한 성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며 요구한다. 목사는 아마 예수님 수준을 들이대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실상이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주님의 제자, 예수쟁이들이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종교에서는 도를 오래 닦으면 득도해서 도사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기준을 요구하는 듯하다. 너희들은 왜 예수를 오래 믿는 데도 그 모양이냐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본질은 결코 도인이 아닌, 도인이 되라고도, 될 수도 없는, 여전히 죄 많은 죄인의 신분으로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비록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라가라는 사실이다. 참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과 교회의 본질이며 제자의 삶의 세계관이다. 

예수를 오래 믿으면 타종교에서 말하듯 계급이 높아지듯이 목에 힘이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성경은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은 더욱 더 자기의 죄성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여전히 스스로 득도할 날은 멀기만 한 것으로 말한다. 정말 신앙 좋다는 분을 만나보면, 늘 그분의 삶에 배어나오는 고백은 “나 같은 죄인이 뭘 제대로 한 게 있나요”라는 말의 단순반복일 뿐이다. 아 이 예수향기를 어떻게 설명하랴! 이것이 예수신앙인격의 비밀이며 본질이다. 수고하고도 무익함을 자랑하는 제자의 비밀이다.  

 

오직은혜, 예수향기, 회복

오직 은혜로만 인격도 바뀌어지고 특유의 향내가 나게 된다. 예수향기이다. 예수향기는 빛나는 금빛 십자가 목걸이에 근거하지도 산속에 들어가서 모진 고행을 함으로 얻어짐도 아니다. 예수 향기는 또한 목이 곧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종교적 직업자들에게서 절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리와 같이 자기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날마다 내려놓으며 통회 자복하는 그 정결한 심령위에 놓여지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니, 세상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가 가진 인간인격의 기준을 가지고서 말하고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신앙 내놓아도 사람 좋다는 소리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목사로서 인격적인 부분을 말할 때 부끄럽지만 툭 터놓고 말한다. “저는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저를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직 하나님을 너무나도 닮지 못했습니다. 지나가는 한소리 들어도 그걸 잘 소화 못해서 잠들지 못하고 끙끙대는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아주 조금밖에 예수님 닮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성령충만할 때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 앞에서든 하나님 앞에든 고백하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새롭게 주님 모습 닮아보려는 자신감이 생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16년 동안 한 목사가 목회를 했으니, 성도들의 인내와 하나님의 긍휼 앞에 목사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초대교회가 그러했듯 여러 부분에서 더욱 갈등과 오해가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 갈등과 오해의 중심에는 스승 되신 주님을 닮지 못한 우리의 모난 인격이 들어 있을 것이다. 지상교회에 문제가 전혀 없는 교회는 없듯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디나 문제가 있으니 그냥 살자? 이건 또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무엇이 해법이 되는가? 그것은 단지 주님의 은혜로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린 것이다. 참된 해법이다.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체질자체가 죄인됨에서 출발했고,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천하에 약한 사람이 바로 나임을 날마다 확인하는 사람이면, 그리고 그럴 정도로 자기회개에 강한 성도와 목사라면,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포기하고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된다면 교회는 문제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이기는 멋지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주님 앞에 칭찬받는 제자가 될 것이다. 마침내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로 하여금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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