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원하는 시대

-세상의 각성, 교회의 회복
전남수 목사

강도의 소굴

 

노아의 시대처럼 죄가 만연해가는 세상이다. 신앙을 말하는 신자들도 죄에 대한 감각들이 희미해져 간다. 세상의 타락에는 무엇보다 교회의 잘못이 크다. 예수님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강도의 소굴은 어떤 곳인가? 세상에서 강도짓을 하고도 자기 소굴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저들은 죄의 불안함을 씻어내고 편안함과 안식을 느낄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범하는 죄와 잘못들에 대해, 마땅히 예배를 통해 교정시키고 책망하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모습들은 세상에서 범한 죄에 대해 그 죄를 씻음으로 얻고 누리는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무관한 편안함과 만족만을 주고자 열심이다. 과연 주님이 지금의 교회들을 보시며 뭐라고 하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죄를 죄로 감각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에 치명적이다. 말씀과 성령에 감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편안함과 익숙함은 마치 따뜻한 물속에서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영혼을 서서히 감각 없이 병들어 죽게 한다. 온전한 신앙생활은 익숙함이라는 관성의 영향에 주의해야 한다. 익숙함이란,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 편안함을 말한다. 익숙한 것은 언뜻 좋아 보인다. 그러나 세상의 일과 기술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늘 깨어 있어 한밤중에라도 주님 만날 것을 예비하며 살아야 될 신앙인에게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소비자 중심의 교회

 

오늘날은 인공지능의 발달을 포함하여 편리함의 첨단을 살다보니 도무지 삶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고난의 불편함을 인내와 기쁨으로 지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불편하다 싶으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돌아선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그러한 성도들을 위해 불편하지 않도록 많은 것을 배려한다. 당연한 섬김의 과정이겠지만 실제 그 열매들을 보면 성장하고 성숙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적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도록 과보호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설교, 성경공부, 구역모임, 봉사활동 등 모든 것에서 가급적 불편해 보이는 부분을 제하고, 소비자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을 본다. 마치 자기 돈을 들고 쇼핑몰에 가서 물건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사는 것처럼 교회생활과 예배생활을 한다. 힘들고 어려운 것은 조금 더 헌금을 해서, 유급 사역자들을 통해서 일하게 하고 자신들은 그 들의 봉사를 통해 누리기만을 원한다. 

어떤 교회는 3년마다 목회자가 바뀌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3년 들었으면 웬만큼 다 들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설교의 흐름이나 논리를 알게 되었으니, 더 들을 게 없다는 것이다.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하고, 계시의 말씀을 목회자의 의견처럼 듣는 저들로 인해 결국 교회는 늘 싸움이 그칠 날이 없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마치 어린아이들의 유치원에서 벌어질만한 일들이다. 이해와 관용을 배우기보다는 삐치고 토라지고 작은 일에도 참지 못하며 사나워진다. 자기 영혼을 다스리며 성숙시키지 못한 그 거친 형상들이 무기가 되어 서로를 찌르는 것이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교회를 망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호불호를 따라 적응하지 못한 영혼들은 또 다른 자신을 편안하게 해 줄 곳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주일날 대형교회 근처의 커피숍에 성경책을 펼친 이들이 점차 늘어간다고 한다. 교회의 그 딱딱한 장의자, 지루해 보이는 순서들, 많은 사람들과의 부딪힘들, 봉사와 헌신의 부담스러움, 이 모든 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은 한마디로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무런 간섭도 없고, 봉사의 부담도 없는 미국교회를 통해 신앙의 명맥을 유지한다. 더 심한 사람들은 아예 공적인 교회생활을 포기하기도 한다.

 

익숙한 성도, 불편한 교회

 

교회생활에 익숙한 것을 마치 신앙이 좋아지고 성숙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교회생활 몇 년이라는 것이 그의 삶에 중요한 훈장이 된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한 채, 터줏대감처럼 교회생활의 편안함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유해할 따름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보장하고자 애를 쓴다. 교회가 세상의 현실을 따라가고 성도를 소비자처럼 저들의 요구에 타협하는 것으로 쉽게 무장해제한다.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와서 주일을 구별하여 거룩히 지키며, 하나님의 교회 앞에 마땅히 감당할 헌신을 감당하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릴 줄 알며, 자신뿐 아니라 성도의 고통스런 문제를 나의 기도제목으로 삼을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배움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이를 듣지 못하면 어디서 들을 것인가? 교회에서 성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른 길 가도록 외치지 않으면,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을 것인가? 괜찮다고 말한다. 때가 되어 은혜가 되면 깨달을 날이 온다고 항변한다. 몸은 썩어 가는데 약간의 피부약을 발라주는 격이다. 영적인 억압과 세상의 억압과 죄의 억압이 커져 점점 타락되어감에도, 대수롭지 않게 느끼며 나아가고 있다. 

진짜 위기는 이러한 세상의 편리함에 동조하며 세상과 구별 없는 교회를 통해 시작되는 것이다. 

세상의 각성과 교회의 회복

 

세상으로 하여금 각성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이여 깨어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권하며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먼저 교회의 온전함, 예배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교회가 깨어나고, 성도들이 영적 잠에서 깨어날 때, 세상의 각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예배의 회복이 세상을 깨우며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는 축복의 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던 유다 왕 요시아로부터 시드기야 왕 때까지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들의 죄를 지적하며 외쳐댔지만,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바꾼 채 자기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변론을 내놓을 따름이다. 결국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너희들은 자고새처럼 살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자고새의 의미가 무엇인가? 속임과 도적질의 상징이다.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 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가면 형식적인 신앙이요, 종교적인 삶이 되어 결국은 하나님을 속이고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며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치유하려고 외치기 전에 교회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편리함과 소비자중심주의에 물든 사상들을 제하여야 한다. 사람의 편리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교회는 회복될 수 없다. 세상을 깨울 수 없다. 예배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말씀하시는 대로 하여야 교회와 예배가 회복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세상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려 한다. 또한 축복을 받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신앙도 회복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무기력한 성도가 되며, 그의 섬기는 교회는 승리하지 못하는 책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종교를 원하는 시대

 

오늘날 사람들의 원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종교이다.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친목 하는 모임으로 전락했다. 사람에게 굴복하고 세상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신을 땅에 부딪치지 아니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자만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로 가득하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사데교회의 모습과 같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다’ 실제로 생명이 없는 교회가 사데교회였다. 세상을 향한 회복과 각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됨을 회복해야 한다. 소비자중심주의, 편리주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벗어나 참된 진리를 선포하며 진리 안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세상도 깨어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4.0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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