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피투(被投, Geworfenheit)’된 존재로 설명한다. 인간 개인의 존재를 ‘세상에 던져짐을 당한 것’으로 말한다. 왜 사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와 조국 인종 색깔 들을 스스로 선택하며 삶을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어났기에 살고 있고,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인생의 기계적인 단면을 잘 설명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마치 차가 달리는 것을 보며 이유와 목적을 묻지 않은 채, 그저 아직도 개스가 떨어지지 않았기에 움직이고 달릴 수 있다는 말장난 같은 것에 불과하다. 삶의 단면은 설명하고 있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항해의 목적과 방향, 그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유를 묻지 않는 인생
사막 광야 같은 이민 땅을 살아가면서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시간이 갈수록 무디어져 가는 것을 본다. 마치 먹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어서, 몸이 고장 나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갈 데까지 달려간다는 이들이 많다. 먹고 살기에 바쁘고 힘겹다는 이유로, 정작 왜 그렇게 바쁘고 힘겨워하면서도 살아내야 하는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도 바쁜 세상살이에서 한번 해치우고 지나가는 수준에 만족할 따름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진지한 질문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자녀들이 추위를 별로 못 느끼는지 겨울에도 짧은 옷을 입고 다닌다. 그때 주의를 주는 말이 있다. 네 몸이 추위를 느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코에서는 콧물이 흐를 것이고, 공부에 집중하기엔 이미 면역체계가 무너져 집중도 안 되고 약을 달고 지내야 할 것이다. 추위를 느끼기 전에 미리 보호하고 보완했어야 함에도 부주의한 자녀들은 일이 닥칠 때까지 거의 집중하지 않는다. 이민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 아무리 급박하게 돌아간다 하여도 매순간 하나님 앞에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 저 잘 살고 있습니까?
일정한 질문과 점검
사막의 레이스에 도전하는 선수들 가운데, 갈증으로 인해 중도에 낙오하여 생명을 잃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갈증에 물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리 물을 먹었어야 했는데, 갈증이 심각해질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옆에 마시다 만 물병을 둔 채로 혼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 있고 훌륭한 선수들은 사막에서 물이 필요할 때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거리를 정해두고 일정하게 물을 마시면서 페이스 조절을 한다.
다른 세상의 일들도 그와 같을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 잠이 와야만 침대에 눕는 이들이 있다. 학습에 실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새벽까지 이런 저런 일 하다가 잠이 드는 경우, 대부분의 경우 아침기상시간을 지키지 못한다. 혹은 허리가 아플 정도로 잠을 자다가 이부자리를 정리할 것이다. 공부 못하는 게으른 학생들의 멋대로 상태의 생활 모습이다. 결국, 일정하게 계획하고 준비하고 예비하지 못하는 삶은 그 무엇을 하더라도 결코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짧고 유한한 인생의 시간을 잘 지나가려면, 전기동력이 공급되면 무한정 움직이는 공장 기계 같은 삶을 멈추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따라야 한다. '피투'된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수명이 다하기까지 기계가 돌아가듯이 삶의 쳇바퀴를 돌리며 살아가는 그 실존의 허무함을 벗어내야 한다. 분명한 삶의 가치와 이유, 목표와 방향을 분명하게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수단과 방법보다 본질의식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반려동물 장례식을 치러 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 한다. 천국에서도 그 강아지와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욕의 어느 거리에서는 성탄절에 개 세례식을 베풀어준다고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예식을 남용하는 것은 분명히 죄가 된다.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 의식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귀하고 멋있는 동물도 훈련의 결과요 본능이지 결코 사람과 같은 영혼의 활동이 될 수는 없다. 동물은 영혼이 없기에, 죽으면 그냥 몸이 땅에 썩어 없어진다. 오직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모든 것을 의식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항상 질문하며 살아야 한다. 나의 존재의 주인은 누구이시며, 그분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마치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알려면, 자기를 열심히 연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게서 답을 얻고자 하듯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주님 안에서 늘 깨어있는 신앙의 상태가 중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남자는 많지만 내 남편은 한 사람이라는 그 좋음을 의식하지 못할 때 인생은 온통 바가지 긁는 소리가 요란할 것이다. 그 가정은 좋은 것을 좋은 줄 모르는 원망하는 아내와 자식들로 가득할 것이다.
의식 없는 인생의 끝
의식하지 못하는 인생의 결론은 죽음으로 연기처럼 사라지는 짐승의 몸과 같이 허망함에 이를 따름이다. 한국의 이십대 청년 아이가 최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돈과 인기를 가졌음에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한 욕심을 쫓다가, 결국은 그렇게 목표하던 바로 그 돈 때문에 그와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허망의 결론의 자리에 들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 젊은 아이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하룻밤에 1억원짜리 술 메뉴를 제공하고, 이 메뉴가 그의 사업의 주된 성공요인이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일일이 꼬박 꼬박 세금내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속을 뒤집을 만한 이야기이다. 더불어 그렇게 정신없는 일을 벌이면서도 공중파 TV에 나와서는 젊은 사업가의 성공신화처럼 떠들었으며 많은 이들이 이를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세상이 주는 쾌락은 의식의 감각을 상실케 만든다. 쾌락을 통해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만, 참된 기쁨은 가려버리고 결국은 허무함에 이르도록 의식만 마비시켜가는 것이다. 결국 세상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대한 갈증뿐이다. 하나님이 설명하고 해석해주지 않는 그 삶은 마침내 허무함과 허망함에 빠지게 될 따름이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임에도, 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 결국 그 영혼과 삶은 깊은 절망과 탄식에 귀착되고 말 것이다.
인생은 의미이다
검고 냄새나는 인도 땅의 저녁시간에 위험을 무릅쓰고 2불짜리 모포를 노숙자들에게 덮어주기 위해 선교사님들은 그 밤에 길을 나선다. 어둔 밤을 지나는 선교사님들의 그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이것이 주를 향한 사명이라는 믿음만이 존재한다.
캄캄한 인도의 밤을 지나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마음중심으로 그 행복을 고백한다. 시편 8편을 찬양하며 감사해 한다.
12시간을 투자해서 주일 설교를 하는데, 졸고 있는 성도가 있어도 하나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다고 고백한다. 열심히 한 사람 두 사람 전도해서 개척교회를 세웠더니, 한순간에 이웃 큰 교회로 몽땅 가버렸다며 속이 상한 중에도, 큰집이나 작은 집이나 모두 아버지 집 아니냐고 말씀하는 목사님이 계신다. 스스로를 행복자라고 겸손히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살아가는 이유, 삶의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그 인생의 길이 짐승처럼 이 땅에서 죽음으로 사라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천국까지 그 삶이 잇대어 있음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 미주 땅에 살아도 그 사명에 맞는 의식과 은혜가 없으면 그 삶은 지옥을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깨어 의식하며 사명 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davidnjeon@yahoo.com
03.2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