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는 삶의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 많은 사람들이 감사와 결단으로 은혜주시기를 기도한다. 무엇을 결심하는가? 무엇보다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또 한해의 인생의 연한이 지나가기를 기도하게 된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 가문 자손들에게까지 그 복이 흘러가도록 기도하며 사모하게 된다.
많은 소유보다 사모할 것
새해의 결심을 상담하게 될 때, 나 자신을 포함해서 하나님 앞에 더 받고 더 구하기보다는 조금 더 슬림하게 삶을 가꾸어가기를 권고한다. 많은 것을 채우려고 애쓰다가 낙심하고 낙망하는 존재가 아니라, 현재의 것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누리고 베풀고 나누며 사는 인생의 복을 누리도록 권면하게 된다. 최근 들어 갑작스런 사건 사고로 주변의 지인들이 귀한 생명을 잃는 소식을 듣다보면, 모으고 채우고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님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언제 주님 오실는지 알지 못하는 때에, 언제 주님 앞에 불려갈 지라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주안에서 참 행복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입에서 절로 기도가 터져 나온다. 주여 버릴 것을 속히 버리게 하옵시고, 내 생명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더욱 철저하게 믿어가는 사역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집을 청소하는 비결은 잘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아무리 쓸고 닦고 하여도 쓰레기로 가득한 집은 오염물의 냄새만 날 따름이다.
무엇보다 새해에는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것들을 그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드린다. 느헤미야처럼, 내 문제 내 가정 내 사역 등등 내 문제에 매여서 일희일비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 가는 곳, 주님의 관심이 가는 곳에 마음을 두고 귀를 열고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주님 원하는 것 나도 원하고, 주님 좋아하는 것 나도 좋아하고, 주님 싫어하는 것이면 목숨 걸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상
하나님이 보시는 악이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그 무엇인가를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왜 이것으로부터 마음을 떼어 놓아야 하는가? 결국에는 잘되기를 바라며 섬긴 그 우상이 나와 주변을 망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그것이 오히려 원망과 탄식이 됨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어느 날 곧 우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나에게 명령하고, 나의 인생을 그 복 없는 자리,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자리로 이끌어가심을 보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우상덩어리가 관리되지 못한 물질과 절제되지 못한 자녀사랑에 대한 생각들이다.
관리되지 못하는 물질
성도들의 삶 가운데, 가장 우상시 될 만한 것이 물질이다. 돈이다. 사람들은 돈으로 표현되는 물질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하며 우상섬기는 것에도 거침없이 행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습은 무엇인가? 물질의 그 수고로움들 앞에서 숨도 못 쉬도록 한 순간에 거두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된다. 한숨 쉬고 낙담할 것 밖에는 없게 된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좀 더 농사의 수확을 얻고자 바알신을 섬기면서 정착민의 농업기술을 배우려 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농업기술을 전수하면서, 최종적으로 우상 앞에 절해야 함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할 틈도 없이 거침없이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저들의 상식적인 형편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오히려 저들이 가장 약할 때, 이웃나라를 막대기로 사용하셔서 그들이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거두려했던 바로 그것을 거두어 가버리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없는 영화를 보고자 할 때, 얼마나 허망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파종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본다. 가장 목마르고 가난하며 먹을 양식이 없을 때 하나님은 미디안 사람, 아말렉 사람, 동방사람을 올려 보내서 그들을 토지소산을 멸해버리도록 하신 것이다. 양이나 나귀나 소까지도 다 쓸어가 버렸다. 농사 잘 지어보려고 우상도 찾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는데,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을 버리면서까지 붙들려고 한 그것을, 한 순간에 치워버리시는 것을 보게 된다. 왜 하필 그때인가? 영적인 해석을 찾는다면 하나님의 때는 너무나 정확하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가 그 사랑을 소홀히 하며 내어버릴 때,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취하는지 정확하게 보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는 세상 앞에 무릎 꿇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하며 세상 앞에서는 타협하고 무릎 꿇는 자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인생으로 전락하게 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 스스로 말씀의 정확한 성취를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축복과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에는 그토록 하나님 없이 잘할 것 같은 일로 인해, 오히려 더 비참하게 털려버리고, 다 빼앗겨 버린 채 없을 때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버리게 되는 것을 본다. 그 열매가 무엇인가? 자신이 수고하여 농사를 지었음에도, 포도주 틀에서 양식을 구하며, 산의 구멍과 토굴에서 겨우 연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질이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힘써 수고하며 땀 흘려 거둬들인 내 재물이 얼마나 소중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물질의 풍요로움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돈이 참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욕심을 내려놓는 결단을 해야 한다. 내려놓을수록 주님이 채우시고 갚아주시고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신다. 주님의 뜻과 방법이 가장 선하고 온전하다.
또 다른 소유, 자녀
물질과 더불어 우리마음에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자녀를 향한 쉼 없는 걱정과 염려들이다. 자신과 주변에서 하나님보다 자녀사랑이 더 큰 경우가 많음을 자주 보게 된다. 이민생활과 돈 버는 모든 경제활동의 목적도 자녀에 집중되고 그 마음이 온통 자녀 사랑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음을 본다. 자녀를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는 것이다. 회복의 길이 무엇인가? 이 땅의 그 어느 것 보다도 우리 하나님이 가장 우선 되신 분임을 자각해야 한다. 대개의 부모들은 욕심이 많다. 내가 낳았기에 내 자녀고, 그래서 자신의 눈에 넣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사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모든 것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꼭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자녀도 인간적인 욕심일 따름이지, 자식과의 사이에도 참 기쁨이 사라지게 된다.
자녀를 우상처럼 여기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눈에 있는 그 비늘을 반드시 제거하는 과정을 지나게 하신다.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때, 그 자녀가 부모의 삶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재앙거리로 바뀌고, 결국에는 그 자녀로 인하여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됨을 본다. 효자가 공부를 잘하면 가문을 빛내지만, 불효자가 공부를 잘하면 아버지 멱살을 잡는다는 원리와 같다. 인생의 기본기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나지 못할 때 결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담을 수 없음을 목도하게 된다. 부모의 욕심이 한순간에 쏟아 부은 물과 같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문제는 마음과 함께 영적인 힘도 함께 녹아내리는 것이다. 자식의 속썩임은 평생 부모의 한이 된다. 그런데 그 동기는 부모가 제공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살에 자녀를 주셨을 때,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하고 좋았겠는가?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셨다. 그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의 제물로 내놓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확하시다. 아들을 바치라고 했으면, 이스마엘도 아들이니 바꿔치기도 했을 법한데, 하나님은 분명히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정확하게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자식을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을 팔십육세부터 구십구세까지 13년간 만나주지 않음을 본다. ‘애나 보라’는 뜻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이스마엘을 키우는 그 십삼년의 세월은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세월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복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를 그냥 두지않으시고 정말 말씀대로 태어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므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 믿음의 조상됨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그를 테스트하신 것이다. 그래서 칼을 들어 이삭을 치려는 순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을 동시에 축복하시며 번제할 양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우상 노릇하는 자녀들을 교회 앞으로, 말씀과 성령 앞으로 내려놓아야 한다. 날마다 아브라함의 축복과 그 믿음을 구하면서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자녀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신앙을 가져가면 좋겠다. 관리되지 못하는 물질과 절제되지 못한 자녀들이 우상 노릇할 수 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결단하여 기도함으로, 새해를 주님의 마음과 꿈과 소망을 품은 한해로 승전하며 나아가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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