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개혁, 세상의 변화

- 교회의 변화, 세상을 향한 표지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올해 2017년을 수놓았던 종교개혁 500주년의 무수한 행사들과 말의 향연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측면이 많음을 본다. 많은 기관과 사람과 물질이 투입되었을 텐데, 교회의 본질적인 변화를 주도할만한 개혁안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듯해서다. 결코 성공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시대가 500년 전보다 더 악해진 측면도 있을 것이겠지만 교회는 여전히 혼돈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며 복음 안에서 본질적인 변화와 개혁을 도모할만한 일들의 모멘텀을 생성하지 못했다는 평가 때문이다. 교회의 개혁을 통한 세상의 변혁을 드러낸 개혁자들의 피뿌린 헌신들을 온전히 구현하고 대체할 그 무엇인가를 찾지 못했다는 다수의 소견에 적극적인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한 가지 소망을 품는 것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지상교회의 불완전함에 대한 선지자적 언구를 따르는 것이다. 이에 동의하여, 또 하나의 언설을 쓸어 담는 듯 하여도 한 가지 첨언해야 할 것은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개혁을 위한 가르침의 일을 주저함 없이 반복적으로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침이 부재한 교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생의 복된 모습들은 타락이후에 상실되었다. 타락이후 죄를 향한 본성만이 득세하며 모든 것을 파괴적으로 몰아가게 되었다. 스스로의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고집하며 아무런 소망 없는 존재로 자신을 방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한 죄인들이 주 예수 안에서 교회를 통해 회복이 되었지만, 여전히 가르침을 받아야할 불완전한 존재로서 교회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주체가 되었다. 이를 회복할 길은 없는가? 교회의 온전한 교회됨을 지키며 세상의 변혁을 주도할만한 길은 무엇인가?

호주의 힐송처치를 방문하기 위해서 여름휴가 전부를 사용한 이를 알고 있다. 그의 설명은 여행관광 겸 폭포수 아래에서 자신의 영혼을 씻음 같은 시원함을 경험하고 온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의 설명을 들어보면, 과연 그곳이 참된 교회와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곳에는 복음의 자유함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교회 안에도 타투하고 동성애자로 보여지는 이상한 몸짓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복음 안에서 모든 것을 관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교회가 과연 저렇게 몸에 이상한 그림과 동성애자들을 편안하게 정주할 수 있는 공간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회로 나아와서 신앙생활을 도모할 수는 있겠지만, 계속해서 그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타락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감정의 뜨거운 찬양은 존재하여도 반복적이고 주기적인 말씀이 없고 가르침이 없으니, 찔림과 회개와 돌이킴의 역사가 없음으로 여전히 타락의 변함없는 현상들만이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에 레즈비언도 오고 게이도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그룹을 만들어 꽈리를 틀고 자신들의 친교를 유지해 간다면 분명히 교회로서의 존재이유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의 변화

온전한 교회됨은 교회 안에 죄의 본성을 거스를만한 가르침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교회는 가르치는 사역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가장 중요한 것이 가르치는 사역이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바다 위를 걸으셨고, 험한 파도가 칠 때 파도를 꾸짖으시면서 잠잠케 하셨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기적을 나타내셨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맡아 주셨던 것이다.

3년 공생애를 지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는지 생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열두제자에게 가르쳐주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 열두 사도를 통해서 온 세계를 가르치는 사역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교회에 가장 본질적인 것 하나는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시간을 낭비하라, 거룩한 낭비를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밤낮 주야를 거치지 말고 가르치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선교신학자 쿨만은, ‘예수님의 사역은 사람을 세우는 사역이었다’고 말한다. 사람을 세우는 사역을 끊임없이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을 세우는 게 뭔가? 가르치게 하기 위해 사람을 세우고,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다. 일본 교회는 0.05퍼센트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교회가 많지 않다. 이런 교회가 일본 속에 있는데 일본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는다고 한다. 그들은 거짓말을 아예 안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교회 성도들은 보증수표다. 나는 어느 교회 나가고 그리스도인이고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순간에 다 믿는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을 백프로 믿는 사회가 바로 일본사회라고 그렇게 말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굉장한 부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때 7년 동안 일본교회가 부흥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선교사님들이 그렇게 보고 했다고 한다. 일본은 멀지 않아 선교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될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일본이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 거기에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 교단은 조선선교의 큰 일을 감당했다. 당시 그들이 선교보고를 하는 내용들을 보면 자신들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 선교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조선 사람들이 선교사들보다 더 열심을 내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일본과 비슷한 보고서가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면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 그 근본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은 가르치지를 못해서 온전한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한국교회는 매일 같이 모여서 새벽기도부터 예배와 예배, 성경공부와 성경공부, 등등의 성경의 가르침을 계속해서 행하는 일들 속에 부흥의 열매를 보았다는 것이다. 비록 세속화된 문화적 현상들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독교적인 문화가 한국사회 곳곳에 배어있는 것을 보게 된다.

모이기를 힘쓰며 가르침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초대교회 시대에 많은 성도들은 모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 듣고 배우는데 더 기쁨이 가득 차고 그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성도들에게 알게 함으로써 집에 있는 시간은 고작 잠자는 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은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이처럼 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것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 교회는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만 한다면 안 가르칠 주의 종이 없다고 하는 걸 생각하면서 정말 축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민 교회는 어떠한가? 성도들의 형편에 맞추어 예배를 점점 폐하는 시대, 말씀공부로 성도들을 붙들어 두기에 부담스러워하는 시대를 지나간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하나님의 부흥은 오직 한 가지 말씀을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치며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들에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구름 떼 같은 성도가 모인다 할지라도 그곳에 크리스탈처치처럼 구경꾼들 관광객들로만 붐빈다면 교회가 쇼하는 장소도 아니고, 그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가르치고 배우지 않으면 변질

사도행전 19장에 가서 보면 두란노 서원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원하는 학당을 얘기하는 것이다. 거기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나온다. 베뢰아 사람들이 누군가? 다 신사라고 했다. 다 고위 공무원들, 머리가 좋은 박사들이다. 이 사람들이 베뢰아에 모여서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길 기뻐하고 저녁마다 모여서 떡을 떼기에 쉬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아니하면 가르치지 아니하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변질되게 되어있다. 그래서 성경에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온다. 그 일곱 교회 중에서 정말 왜 첫사랑을 잊어버렸느냐? 왜 미지근하냐? 왜 온전히 섬기지 못하냐? 등등 교회의 변질에 대해 책망을 받았는데, 한 교회만 칭찬을 받는다. 어떤 교회인가 봤더니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가르치는 교회였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어 나가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 중 가장 중요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교회이다.

신약 성경과 구약성경에 시대적으로 나누어 볼 때 회당사역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지으신 성전,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스룹바벨에 의해서 성전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다시 파괴되었다. 그리고나서 이후에 다시 그 성전이 헤롯대왕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였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렇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전에 헤롯에 의해 복원되기 전에 회당이라는 것이 세워졌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면 회당은 동네방네 생긴 것이다. 이 회당에서 말씀이 증거 되고 전파되고 가르치기에 힘쓰는 곳이 되었다. 오늘날 이 회당이 교회의 모형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만큼 회당이 곳곳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도 했다. 주님도 회당에 가셔서 가르치기에 힘쓰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회당이 세워진 것을 보면 알겠지만 회당의 개념이 성전 개념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한번 예배드리는 성전의 개념보다 회당은 날마다 밤마다 낮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 사회 속에 교육시설도 되었고 문화시설도 되었고 생활공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성도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이 교회가 바로 모든 삶의 중심이 되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그렇게 되었던 것이 회당 중심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본질이 그대로 유지되었을 때 그 뒤에 사도들이 세워지고 사도들에 의한 제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많이 나타난 제자들에 의해서 전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교회의 변혁, 세상의 소망

교회의 변혁은 세상의 소망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한다. 빛을 비추어라 하여도, 빛이 되지 못하면 의미 없는 허구에 불과하다. 소금의 역할을 하고 싶어도 짠맛을 잃어버리면 불가능한 것이다. 먼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 말씀의 충분한 가르침과 이로 인한 성령의 역사로만이 변화된 교회, 개혁된 교회가 세상 앞에서 주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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