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예배를 회복함으로 세상과 죄를 이김-II

-형식적인 신앙, 종교적인 삶, 부담 는 교회생활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침체에 빠진 교회와 성도들의 특징은 예배가 형식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예배가 보여주는 의식 중심으로 흐르게 되고, 불필요한 많은 논쟁과 변론도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함으로 나타난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예배가 회복되면 부흥이 일어나고 회개가 나타나며 은혜가 풍성해짐을 목도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예배가운데 드려지는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찬양하거나 자신의 감정의 기복을 실어 찬양한다면 성령은 함께 하시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의 감정풀이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는 경우이다.

형식적 예배의 필연적 타락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대로 행할 뿐이다.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잘 되어가는 것 같은 자만과 교만에 빠지게 한다. 이것이 형식화된 예배의 특징이다. 이런 상태로는 빛 되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지도 못하고 발견할 수도 없는 어두움에 머무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단정한 옷차림으로 예배에 나오고 늘 빠지지 않고 나오며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게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배함은 참 좋은 습관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예배의 본질을 놓치고 그런 형식에만 매인다면 그는 결코 올바른 예배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주목함이 없이 그를 통과의례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이니 잘못된 예배자의 전형이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나고 경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여야 한다. 이것이 분명한 신앙의 본질이다. 이것이 없이는 예배의 모습으로 드려진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의 수많은 일들이 이를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열왕기서에 나타난 왕들의 타락과 연결된 형식적인 신앙의 행태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김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들이 증거가 된다. 더욱 분명한 것은 말라기서에 나타난 외식적 십일조, 제물에 대한 속임수, 율법의 근본정신에 대한 무시와 심령의 완고함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을 보여준다. 본질이 상실된 형식은 반드시 타락하게 됨을 적시해주는 교훈들이다.

본질이 살아있는 바른 예배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바른 예배는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이다. 호세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For I desired mercy, and not sacrifice; and the knowledge of God more than burnt offerings)”(호6:6). 예배를 왜 드리는가? 우리를 찾아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쫓아다니던 백성들 모두가 “할렐루야”를 외치고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사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예배가 성립될 수는 없다. 아무리 멋진 예배를 드렸다 하더라도 예배를 받으실 주님이 없다면 예배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된 예배의 승리는 진정으로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다. 주님이 찾아주시고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과정이 예배이다. 그분을 만나 경배하고 그분의 행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예배이다.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예배이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이며, 바른 예배의 핵심이다. 예배가 형식적일수록 신앙은 타락할 수밖에 없고 타락된 신앙일수록 예배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예배를 온전히 회복하는 길은 오직 신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이것 외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 요한복음 4장 23-24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보아도 그렇고 교회사를 보더라도 그 역사가 말해준다.

예배보다 종교를 원하는 사람들 타락한 사람들의 원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종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 진리이며,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으신다. 더불어 참된 진리 안에서 행하여지는 이러한 예배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그 수면에 운행하시게 됨을 볼 것이다. 신령과 진정의 온전한 예배를 경험한다. 교회들이 예산도 있고 프로그램도 있어 빠르게 돌아간다. 하지만 모인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친목하는 모임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에게 굴복하고 세상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또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신을 땅에 부딪치지 아니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자만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배가 회복되면 신앙생활이 종교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예배가운데 하늘로 부어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감격과 기쁨이 있다.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운행하시는 예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운행하심이 신앙의 종교화를 막아내는 능력이 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모이게 된 교회에서의 예배는 말씀과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였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초대교회시대는 성령께서 예배를 주관하셨다. 찬송이 있고 설교가 있고 예언이 있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말씀과 성령이 같이 하셨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른 예배, 진정한 예배의 회복을 통한 삶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통치하시며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예배를 위해 힘써야 한다.

형식과 형식주의 형식은 아름다운 틀이지만 그러나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타락된 것이며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라고 말해야 한다. 흔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신 사데교회 같은 곳이 되었음을 본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있다’는 주님의 음성처럼 실제로 생명이 없는 교회가 사데교회였다. 그런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면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던 그 생명이 없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수가 말라버렸던 것이다. 오늘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감동과 감격이 없는 교회가 이러한 모습이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성숙이 아닌 교회생활에 익숙한 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늦은 비가 있고 이른 비도 있어 어떤 것으로든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예배의 위기라는 현실에 분명히 직면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예배의 회복 - 세상의 회복 사람들은 형식적인 것을 좋아한다. 특별한 생동감과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갈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때문이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무슨 일이든지 10년 이상을 하면, 저절로 술술 손과 입과 발이 절로 움직여지며 언제나 작품들이 나오는데, 설교는 날마다 힘들고 어렵고 한편 한편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더라는 것이다. 넋두리처럼 고백하셨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말씀과 성령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과 주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예배가 형식화되고 실패하면, 필연적으로 삶의 영역에서도 무너짐과 실패를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반대로 자비와 인애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진정한 참 예배가 회복될 때, 만물을 소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의 회복이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사단의 역사를 이겨내고, 신앙의 종교화를 막아내며 마침내 삶의 인격과 현장에서 전인적인 회복을 이루게 될 것이다. 즉 바른 예배의 회복이 세상의 회복과 성도의 삶의 회복을 위한 유일한 참 소망이 되는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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