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예배를 회복함으로 세상과 죄를 이김

-형식적인 신앙, 종교적인 삶, 부담 없는 교회생활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성령이 없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은 성령이 역사하셔야 된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인 예배는 더욱 성령께서 충만하게 운행하셔야 되는 것이다.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기도나 말씀 선교 전도에 헌신한다하여도 하나님의 일은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마침내 주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모임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조차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가인처럼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고 책망 받는 존재가 될 따름이다.

그런데 만약 주를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들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사람의 방법과 뜻으로 할 뿐이요,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곧 형식적인 신앙으로 급속히 변질되고 말 것이다. 특별히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인 예배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을 전제하지 못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로마서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라는 말씀이나 혹은 레위기 말씀 가운데 ‘흠 없는 생축’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며 예배하는 자와 말라기 말씀 가운데 ‘병든 것 저는 것 흠이 있는 것을 드리는 예배자’의 모습들과 그 결론들은 생각해 보면, 성령의 임재가 없는 형식적 예배와 신앙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운 절망이 됨을 알 수 있게 된다.

전통주의와 형식주의, 종교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배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편리에 따라 내 마음대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는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이요, 병든 것이다. 예컨대 형식이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형식주의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생명력 없이 형식만 남아 행하는 자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형식주의는 단순전통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 전통주의의 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으로 두고서 그들의 입술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이 영혼은 불쌍하기 짝이 없는 피폐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고, 자기의 조상들이 드렸던 전통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흠향하는 예배가 아니요,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없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종교화 되었으며 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보다는 자신들의 가정생활만을 행복한 삶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본다. 또한 이들의 신앙적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회학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며 문학으로 이해하고 원리를 찾는 것을 좋아한다. 본질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화된 사람들의 특징처럼 앞장서서 헌신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늘 조용하게 뒷자리에서 지켜보며 순리에 따라 행하고 종교를 이용해 나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내 삶에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내가 원하면 하는 것이고,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원치 않으면 싫다”는 것이다. “종교가 나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다.

부담을 주지 않는 신앙생활과 교회 그리스도인임에도 종교화되고 형식주의적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사야 30장 10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레미야 6장 14절의 말씀처럼 ‘They have healed also the hurt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slightly, saying, Peace, peace; when there is no peace.(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거룩한 부담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본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를 소개하며 전도할 때 나누는 전도지에 어떤 교회들은 “우리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기록할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위로의 목회를 추구하고 있어 위로와 사랑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죄와 심판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즉 가급적이면 힘든 이민생활에 신앙생활까지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예배를 회복-형식적 신앙의 극복 지금 시대를 예레미야 당시와 비교할 수 있다. 당시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바로 목전에 다가온 상황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돌이키지 아니하였기에 이방 나라를 들어 저들을 치기 일보직전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는 이미 걷혔고 그들에게 진노하셨기에 예배하는 자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이도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저들의 죄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 백성들은 죄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또한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죄의 억압을 끊지 못한다. 결국은 사탄도 이길 수가 없다. 세상의 세속도 이길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의 메시지는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질 것이다, 위로하고 위로하며 평화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축복도 좋고 사랑도 좋고 위로도 좋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과 죄를 이길 힘을 상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사탄의 궤계와 다툼과 후욕과 시기, 질투, 미움이 성도들의 삶 속에 가득하다. 성도들이 세상과 죄를 이길만한 힘을 빼앗겼던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사도행전 2장 42-47절 말씀에는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승천하시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게 회복되었는가? 이렇게 예배가 회복된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교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두려워했다. 또 교회에는 주님의 승리와 생명과 감격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교회들이 정반대로 흘러가 모이기를 힘쓰지 아니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기를 거부하며 기도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 예배가 무너졌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상해 하실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원하는 쪽-위선과 타락 자고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속임과 도적질의 상징이기도 하고 또한 교회와 진리의 상징이기도 하다.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 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사람이 원하는 쪽으로 가면 형식적인 신앙이요, 종교적인 삶이 되어 하나님을 속이고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며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편리와 원하는 대로 한다면 예배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말씀하시는 대로 하여야 예배가 회복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세상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려고 한다. 또한 축복을 받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예배와 교회 그리고 자신의 신앙이 회복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와 권력이 역사하지 않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또한 죄를 이기는 승리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의로움과 거룩함도 없을 것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역사에 동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의 회복이 드러나야 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예배의 형식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극복하게 한다. 그렇게 드려진 참된 예배는 사람의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진리의 길을 따라감으로 마침내 승리자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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