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목표로 하는 세상과 신앙

- 화석화된 신앙, 타락한 예배자, 영적고갈 -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즐거움을 목표로 하는 예배

죄인 된 사람의 문화와 삶의 양식들은 그 목표를 즐거움의 추구(entertainment)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벤트식을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 형태이며,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즐거움’(entertainment)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의 무너짐에 따라 예배 속에 나타나는 가장 유혹적인 것은 기쁨(Joy)가 아니라 웃음과 즐거움(fun)이다. 성도들의 욕구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채널의 변화를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고, 설교자가 이것을 응용하여 효과의 측면(effectiveness)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보다 달며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고 하였다. 물론 예배의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예배의 신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예배의 중심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서 예배자들이 기쁨을 얻는 것이지,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얻기 위한 예배는 근본적으로 예배의 중심이 잘못되어 있는 예배가 되어지는 것이다.

화석화된 신앙과 예배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in the presence of God) 예배여야 한다. 예배 가운데 영으로 임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를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목표(goal)에 도달한 예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살아있는 예배, 회복된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위로의 손길을 체험함은 물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떨림을 경험하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받고, 기쁨과 감격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사야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으며, 에스겔이 그랬고, 하박국이 그랬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배의 목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예배의 화석화(ossification of worship)이다. 대부분 예배의 회복과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예배의 습관적인 내용에 대한 경직화 때문이다. 예배의 경직된 모습은 예배의 지루함을 야기 시키며, 예배의 역동성(dynamic)을 상실하게 만든다. 역동성이 상실된 예배는 생명력을 상실한 채 견고한 화석이 되게 한다. 화석이 된 공룡보다도 부지런히 겨울 먹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일하는 개미에 생명이 있고, 역동적이다. 그러므로 화석화된 것을 통해서는 그 어떤 생명의 역사를 기대할 수가 없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진종일 걸어가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누가복음에 보면 저들의 영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해준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앞에 서있고, 아니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면서 그들의 고민과 아픔을 듣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저들 앞에 말씀과 성찬이 베풀어졌고, 일상의 식탁을 바꾸어서 성만찬이 되게 하시는 은혜의 성찬 앞에 섰지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사실이 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되도록 하나님의 역사 앞에 민감하며, 영의 눈을 열어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생명력을 회복하여야 한다.

간절함과 영성-자세와 태도

특별히 예배자의 자세가 바뀌어져야 한다.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가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이다. 그 무엇보다도 예배자들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최고의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심을 깨닫고 마치 영적 전쟁을 치르는 전사와 같이 온 마음으로 이 일에 쏟아야 할 것이다. 한 생명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죄의 결박들과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그의 새롭게 하시며 위로하시는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고 돌아가느냐 빈손으로 되돌아가느냐가 판가름 나는 영적 전쟁이라는 관념을 가질 때, 예배자들은 긴박성과 절박성, 간절함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간절함은 자세의 문제 무엇보다도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를 가르쳐주시는데, “네 마음을 다하고(with all your heart), 목숨을 다하고(with all your soul), 뜻을 다하고(with all your mind), 힘을 다하여(with all your strength)" 하라고 가르쳐 주신다(막12:30). 여기에서 주님은 마음 전부, 목숨 전부, 뜻 전부, 힘 전부를 요구하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이다. 최고의 정성과 최고의 노력을 요구하신다. 자세이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이러한 전 존재를 드리는 자세가 경주되어 그분을 섬기는 자세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된 영성은 무엇인가? 성경에 영성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람들의 삶을 생기 있게 해주며,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믿음의 실천과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예컨대 “태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살아가려는 삶의 자세,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 자세가 바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성령에 충만한 삶, 혹은 거룩한 삶이나 경건으로 뜻을 같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예배자의 간절함과 참된 영성, 그것은 자세와 태도의 문제이다.

정신적 퇴락과 영적 고갈

21세기는 변화무쌍한 시대다. 엄청난 변화로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며, 사람들의 관심 하는 바가 달라지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으며 될 것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도 변화의 요구로 인해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정보화의 거대한 물결이 넘쳐 날 것이며, 물질주의와 과학문명은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고 편리하게 할 것이지만, 쾌락과 즐거움(entertainment)을 추구하는 군상들의 발걸음을 하나님에게서 갈수록 멀어가게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퇴락과 더불어 영적세계를 버리고 과학주의가 앞서갈 것이다. 정신적 고갈이 영적고갈로 이어질 것이며 따라서 각종 잘못되고 타락한 종교적 형태를 갖춘 것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이렇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추구하고, 영적 세계를 추구하는 갈증도 더해갈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 속에 어떻게 살아있는 예배, 보다 좋은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든든히 서갈 것인가 하는 것은 당면한 과제이면서도 미래를 생각해야 할 기도 제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 자체를 목적으로 회복

복잡다변한 시대 속에서도 회복된 예배 살아 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 그리고 참된 예배자는 더욱 힘 있게 부흥할 것이며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 이웃들을 섬기며 나갈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생명력 있는 말씀과 은혜와 감격과 감동을 체험한 성도들은 미래의 세계에서도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떠한 시대 속에서도 교회가 힘 있게 서갈 수 있기 위해서 예배가 살아야 한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생명력이 있는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함께 공유하도록 만든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해 보라. 그의 삶의 환경은 실로 절망적이었다. 비관적이었다. 차가운 지중해의 바람에 흰 수염을 흩날리면서, 힘든 노역을 감당해야 하는 죄수의 몸으로 서 있었던 사도요한. 그 절망적인 삶의 상황 가운데서, 함께 예배할 그 누구도 없는 텅 빈 빈들에 서있던 날, 동료 제자들은 모두 순교의 제물이 되어졌고, 홀로 남아 외로움 가운데서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았던 그는 그 예배를 통해 일곱 촛대 일곱 별 사이를 거니시며,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며,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보좌에 높이 계신 주님께 천군 천사들과 함께 면류관 벗어드리며, 참으로 놀라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천상의 예배도 경험하게 된다.

나의 즐거움이 아닌 천상의 예배

사도 요한과 같이 터질 듯 한 감격과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나간다면 우리의 예배도 하늘에 잇대어지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되어 질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장애물은 못 넘어갈 어려운 것도 아니며 또한 장애물이 꼭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예배가 회복된 사람에게 장애물도 단지 장애물일 뿐이다. 나의 즐거움과 위로를 위한 도구로서의 인간중심의 예배, 이는 세상 속에서 기쁨과 소망을 상실한 채 사막광야의 갈증에 소금물을 마심과 같은 것이다. 참된 예배자로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예배의 참된 회복 이것만이 하나님의 사람이요,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의 증거이며,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존재로 드러나게 할 것이다. 이제라도 생각을 바꾸자. 이제라도 태도를 바꾸자. 이제라도 의식을 바꾸자. 이제라도 현상보다는 본질을, 속도보다는 방향을 생각하며 달려가자. 이를 통해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성도를 성도되게 하며, 주님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한결같은 믿음과 마음으로 천상의 예배자에 이르기까지 달려감이 귀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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