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읽고

장려상 정희수(인랜드교회)

내가 내 자신에게 지쳐 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발산해야 살 것 같은데 실제 어떻게 발산할 줄도 몰라 가슴앓이로 속을 썩이고 있을 바로 이 시점에, 나는 ‘신앙도서 독후감 공모전’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책을 만났다. 나는 이 책을 시작도 하기 전에 책 제목을 읽고서 벌컥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울분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1부의 “내 믿음 돌보기”는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면에 던져왔던 질문이 김유비 목사님도 하는 질문이었고 남들도 하는 질문이었다.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 바라보기 참 힘들다, 그 길은 좁은 길이고 정말 가시밭길이구나, 생각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쉴 때가 정말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만 바라봐야 하는지, 그것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왔다. 그런데 그 답은 가까운데 있었다. 바로 예수님 말씀이었다. 이렇게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안을 향하여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나갔다.  

또한 나는 “내 믿음 돌보기”를 통해 내 믿음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나는 내 신앙이 꽤 괜찮은 줄 알았다. 늦잠을 자지 않은 이상 매일 새벽예배를 가곤 한다. 새벽예배도 참석하고 나름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예수님만 바라보며 굳건한 믿음을 이제껏 잘 지켜온다고 생각했는데, 왜 나는 자꾸만 지쳐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시각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 같다. 말씀 중심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살지 않은 교인들을 내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그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틀이 밟힌다고 판단되면 꼬리 눌린 뱀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본성을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표출하며 공격성을 드러낸다.    

나는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의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위로받고 회복되기보다는 상처받아 괴롭고 서글플 때가 더 많다. 기독교인이라는 가면을 쓰고 잔뜩 무엇인가로 포장하고는 있는데,  세상 사람들보다 더 치사하고 비열할 때가 적지 않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무거워지는 건 ‘신앙적 권태기’일까.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내 믿음 돌보기”를 보면, 김유비 목사님도 나처럼 힘든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책 속에는 비슷한 생각,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신앙고민에 잠긴 크리스천들이 나오고 또 나온다. 김유비 목사님이 내담자들에게 상담하는 내용을 듣고 있다 보면 내가 같이 힐링되는 것 같고, 정말 가슴에 와 닿는 위로가 느껴진다. 그 위로 속에 진정성이 느껴진다. 왜일까. 진정한 힐링은 예수님과 연결되어져야 가능하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때다. 

2부의 “내 상처 돌보기”는 내가 내 상처를 돌아보며 가장 큰 위로를 받게 해준 챕터였다. 특히 147페이지의 “돌봄은 잠깐이고, 고통은 계속이에요”라는 표현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마음을 뚫어보고 있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이 순간 상담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다. 내게도 상처가 있다. 나는 제왕절개를 세 번이나 했다. 나는 봉합부위를 이따금 때때로 보다듬고 어루만진다. 아직도 다 힐링되지 않은 느낌을 받기 때문일까.  몸의 상처도 문지르고 또 문지르는데, 마음의 상처는 어떨까. 그동안 나는 마음의 상처를 별로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그래선지 오랫동안 상처는 곪아있었다.       

그 상처가 나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곪은 상처를 스스로 터뜨려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일 줄 안다. 그런데 그 상처가 타인으로부터 왔을 때는 어떤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한 마음을 어떻게 추스릴 지 쉽사리 답을 찾기 어렵다.  

“내 상처 돌보기”에서처럼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려고 애쓰는데 그것은 잠깐이고 그 뒤를 파고드는 부정적인 생각과 자아파괴적인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진다. 그것이 잘못되었고 사탄의 장난이자 농락당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손아귀 위에서 못 벗어나는 것은 왜일까. 

나는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싶어서 타인에게 진심으로 잘해주는 편이다. 예수님께 대하듯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타인을 이웃으로 대해주면 어떨 때 돌아오는 것은 ‘갑질’이다. 내가 잘해준 그 타인은 자신이 잘나서, 고상하고 고결한 무엇인가가 된 줄 착각하고 갑질의 날개를 마음껏 휘두르며 나를 오히려 이용하려 든다. 그런 관계는 물론 오래가지 않아 종지부를 찍는다. 

또한 나는 내 주변에서 거지습성에 젖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마주하고는 실망하고 상처 입게 된다. 이들 무리는 ‘고상함’이나 ‘지적추구’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 자신의 이익, 이권만 추구하려든다. 고통 속에서 못 먹고 헐벗은 자들이 전 세계의 그늘진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배만 불리려는 돼지들. 그들은 자신들이 흙탕물 속에서 뒹굴면서 그것이 흙탕물인지 모른다. 

대충 얻어먹으면 잘 얻어먹지 못해 “돼지꿀꿀”, 좋은 것을 주면 더 좋은 것을 타령하며 “돼지꿀꿀”거린다. 주변의 돼지들은 더 좋은 것을 입고 싶어 하고 더 자랑의 자랑을 하고 싶어 또 “꿀꿀”거린다. 그러면서 치부가 드러나거나 수틀리면 꿈틀대면서 인상을 써댄다. 돼지들의 불평불만 소리는 이곳저곳 여기저기에서 적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들은 복에 겨워 요강에 똥까지 싸는 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족해 똥오줌을 나에게 팍팍 튀기며 장난 반 진담 반을 쳐댄다.  

돼지처럼 “꿀꿀”대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싶어 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은 서글퍼진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돼지가 되어 같이 배불리며 함께 즐기며 놀기를 바란다. 심지어 교회는 어떤가. 전도에 목말라, 영혼구원에 목말라 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지경이다. 답답한 내 가슴은 곪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는데 하소연할 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그 답은 가까운데 있었다. 바로 예수님 말씀이었다. 이렇게 나는 이 책을 통해 내 안을 향하여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씩 찾아나갔다...  

최근에는 나의 영적인 상태를 녹다운시킨 사건이 어떤 기독교모임 식사자리에서 벌어졌다. 죄명은 ‘신랑이 맥주를 마셔서’였다. 고성이 오가며 몸싸움까지 벌어질 뻔했다. 신앙심이 부족한 신랑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왔는데, 신랑이 그 사건을 통해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교회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타인을 진정으로 진심으로 타인을 잘해줄 때 내가 바보여서 잘해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을 내 삶에 드러내고 싶어서 타인에게 예수님께 하듯 대해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내게 돌아오는 것은 돌멩이 가득 메달은 부메랑이었다. 나는 돌멩이 부메랑을 얻어맞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곤 했다. 그리고 내 속은 문둥이처럼 썩어문드러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누구한테 내 마음을 속 시원하게 말도 못하고 억눌리고 답답한 심정을 어디 가서 하소연을 해야 할까. 그런데 하소연할 데가 없다. 새벽기도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드려본다. 기도하면 마음이 풀리는가 싶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의 나’가 울컥울컥하며 울분을 터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타이밍에 만난 “내 상처 돌보기” 책은 대화방식을 통하여 내가 내 안의 상처를 돌보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내가 내 자신과 소통하는 방법을 천천히 차근차근 시도하게끔 도와주었다. 이 책을 통하여 내 마음과 똑같은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그 친구와 소통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3부의 “내 관계 돌보기”를 통하여,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내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누구를 돌본다는 말인가.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무기력할 때가 요즘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데, 내가 타인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나의 무기력한 감정에 굴복한 채 일찍 눈을 떠서 새벽기도를 갈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다시 알람을 끄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한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하여 “내 관계 돌보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여 기도할꼬, 하면서 무기력한 감정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억지로 일어나 새벽예배에 나갔다.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면 나를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께 다시 감사드리고 또다시 하루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에게 “그동안 미안했다, 희수야!” 라고 말해주었다.

4부의 “내 감정 돌보기”에서 나는 자아성찰과 더불어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리로까지 나아갔다. 물론 밥 먹듯 새벽예배에 나가 회개를 하곤 했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내 감정을 돌보는 기도를 단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하여 나는 내 감정을 어루만지고 내 감정을 다스리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이를 통하여 ‘내 안의 나’가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내가 나의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다. “희수야, 그동안 잘 참아줘서 고마워. 넌 지금까지 잘해왔어. 정희수, 화이팅” 나는 내 자신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 얼굴에 웃음이 넘쳐났다. 내가 행복해지니 남편도 아이들도 행복해졌다. 가정에 웃음이 넘치니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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