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김인준(1886-1947?)

한국 선교 그 역사를 찾아서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평양신학교 졸업 후 유학, 시카고한인감리교회 담임 1년 사역

신학박사학위 취득후 1933년 귀국, 이북지역 총신 교장 재직

 

김인준은 1886년 9월 16일에 평북 철산군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출생 2주 되던 날 부친이 사망하였다. 그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통달한 후 평양에서 대성학교와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1926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장로교 총회 장학생으로 가족을 한국에 두고 홀로 유학길에 올라 1929년 4월에 시카고에 도착했고, 그해 가을에 맥코믹 신학교에 입학했다. 

김인준 목사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목사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담임 전도사이자 한국에서 김인준의 친구였던 장세운이 1929년 12월에 사면한 후 김인준이 본 교회 목사로 피선되어 1930년 1월 12일부터 시무했다. 이날 교회 간사로 허 규를 선택하였다. 그해 3월 1일 저녁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시카고대한인공동회의 주최로 삼일절 기념식이 있었다. 50여 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김인준은 염광섭과 함께 소감을 발표했다. 

그달 22일 토요일 저녁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식당에서 만둣국 연회가 열렸는데 근자에 드문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신임 목사 김인준과 신임 간사 허 규가 초청하였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순서가 있었지만 뜻 깊었던 것은 교회건물 매수운동을 하루빨리 완수하자는 소리였다. 그해 5월 상항 한인감리교회 예배당 신축 후 설비마련을 위하여 상항뿐만 아니라 미주한인들이 성의를 다하여 물질로 기부했다. 시카고한인감리교회 교인들도 이에 동조하여 김인준은 2달러를 기부했고, 그 외에도 교인이 기부한 총 42달러 75센트를 보냈다. 

그해 5월 15일에 김인준이 “유미 1년간 감상”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아래의 그의 글에서 도미 과정, 학창 생활 그리고 미주 선교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작년 이때 합중국 땅을 밟을 때의 소감과 1년을 지난 오늘날의 소감이 무엇이 다른지는 자세히 깨닫기 어렵다... 과거 1년간 나의 개인 생활을 반성하여 보는 때에 겸하여 교류 동포 사회와 학생 생활에 대한 사사 의견을 말하여 보고자 한다...

 

1. 나 개인의 사적 생활 

누구나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남다른 큰 뜻을 품고 시기가 아니요, 처지가 미안한 중에서 뛰어나왔다. 아버지가 멀리 간다는 말에 뜻을 잃은 어린 자식의 슬피 울던 그의 소리가 귀에 아직 쟁쟁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정거장 전송하는 마당에 정신없이 서서 기차의 기적 소리가 사라지도록 바라보고 섰던 형용이 눈앞에 현현하고 둘도 없이 사랑하는 여덟 살 먹은 맏아들이 보낸 편지에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소이다. 아버지 집에 계실 때에 혹시 시간이 있으면 소자의 손을 끌고 기자동 공원에 산보하여 앵두꽃을 구경하며 혹시는 대동강에 배를 띄워 영명사앞 충암 절벽의 승경을 더듬게 하시던 일을 잊을 수 없소이다. 먹고 입고 싶은 것은 모친님이 잘하여 줍니다. 아버지의 부탁하신 대로 아우에게 국문을 가르쳐 주어 오는 학기부터 학교에 데리고 다니려 합니다. 아버지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항상 하고 있습니다”한 글이 마음에 서려서 잠시도 잊을 때가 없다. 일번호 어학에 시달리고 양식에 염증 나고 풍속에 괴로워진 나는 당초 어떠한 결심까지도 믿음은 해이하여진 것 같다. 당초에 정거장에서 막상 기차가 발을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 어떤 목사는 박사 되기를 축원하고, 어떤 선교사는 간단하게 영어로 하는 말이 잘 가서 잘 준비하고 잘 돌아와서 일 잘하여 달라고 하고, 어떤 청년은 하는 말이 우리는 선생의 박사 됨도 불원이요, 명예 남도 불원이요, 선생이 지금까지 생각하여 오고 우리가 생각하여 가는 그 방책을 잘 연구하라 하였다. 이 모든 축사를 마음에 두고 있지마는 나 역시 별다른 인물이 아닌지라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 슬프다! 나의 과거 1년의 생활은 소극적이라 함보다 무의미한 생활을 하여 왔다... 

 

(1) 나의 학과 생활

나는 1년간 시카고장로교회신학교 연구과에서 헬라문과 히브리문과 혹시 종교교육학을 연구하였나니 그 소위 종교교육과는... 중단하고 말았다. 히브리문과 헬라문은 계속하였다. 학기 성적도 그만하면 관계치 아니한가 보다. 백인에게도 혹시 놀라는 듯하다. 이 학과를 택하게 된 동기는 본국에 있을 때에 일찍 여러 해 동안 성서지역에 종사하던 관계이다... 희브리문에는 전 소경이었던 관계상 ‘성경’개역회 석상에서 혹 어구에 대하여 강경히 주장하다가도 어떤 회원(선교사)이 히브리 원어를 들고 나설 때는 억울하게 머리를 숙이고만 일이 종종 있었다... 나의 도미의 원인은 아니나 도미시기를 혹 성실한 것만치 학과를 선택하는 원인은 되었다... 헬라어 학과로 논문도 필하였다. 통과 여부는 알 수 없다... 학과생활은 그리하지마는 학생생활에 대하여는 오산이었다. 스스로 생각이 이만한 이력을 가진 내가 가면 어느 학교나 사람이나 다 문을 열고 환영하여 음식도 주고 방도 주고 옷도 주고 돈도 줄줄 알았다... 인하여 미국 유학에 대한 상세를 본국 어느 기관을 통하여 1년 1차식 넓이 광포하여 줄 필요가 있음을 느끼고 아무 경험이 없이 배울 욕심만 가지고 오는 청년 자녀를 위하여 상항이나 나성 같은 곳에 간단한 기관을 베풀고 몇날 동안 식이라도 사정을 알게 하며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혹종의 기술까지 상식적 훈련을 시켰으면 좋을 듯하다. 그리고 동포가 많이 유하는 곳마다 가급적 직업소개소 같은 것과 경우에 의하여는 각 사람에게 합당한 기술까지 강습시켰으면 좋을 듯하다...

1930년 인구조사(Kor은 한국을 의미하며 숫자는 연령)

 

2. 나의 현직 교역 생활

본인이 유하는 지방에는 다행히 교회가 설립되었다. 본인이 그 본래의 역사는 잘 알지 못하나 재류 동포들의 열성과 아울러 김창준, 노준택, 한승곤 제씨의 적임 교역자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이 없는 오늘에도 저들의 말을 하는 교우가 종종 있은즉 참으로 부럽다. 작년 4월에 이곳을 당도하여 우리 교회가 있는 것을 알고 반가워하였다. 당시에 장세윤씨가 임시 전도사로 시무 한다하니 씨는 본국 있을 때부터 친히 아는 학우이며 현재 북미 유학생에게 명예가 쟁쟁한 인사라 한다. 작년 12월에 해 씨가 사면하고 교역자가 없는 당분간은 본 교회 이사회를 조직하고 교무를 진행하니 이병두, 강영소, 염광섭 제씨는 각 방면으로 신망이 좋다 한다. 이네들 9인이 당분 교무 일체를 처리하는 중에 불행히 후계 임시 교역자로 본인이 지명되었다. 일반 교우의 투표에 의하여 절대 거절키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되었나니 늦으나마 재류 일반 신도의 후의를 감사하여 마지아니한다. 하물며 오늘까지 피차의 사랑이 더욱 신성하여짐이오. 본인의 처지 상 경솔히 할 수 없어 본교 교장 스톤 박사와 금년 총회장 맥아피 박사의 의견을 듣고 본 구역감리사 무어 박사의 서명이 있은 후에 의심이 풀어 본인을 과소한 본국 장로교회 총회 학무국장과 총회장에게 이유서를 보내고 금년 1월 12일부터 임시 시무에 착수하였다. 본 교회 이사장 염광섭, 강영소 씨 등은 참으로 인격자이다. 저들의 심부한 경험과 주밀한 경영으로 교회가 다만 자취를 떠난 맛이 보이고 김 경, 천세헌, 정태은 제씨 같으신 이는 유수한 실업가의 호의적 협조 지도를 얻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쁘다. 학과에 매이고 지방 사정이 서툴러지는 3, 4월 동안 유명무실로 여러분의 기대에 실망을 들으실 것이 사실이겠다. 앞으로 얼마나 할지는 아직 모르나 시간은 좀 더 써볼 기회를 준 것은 사실이다.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 유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1930년 4월에 실시한 연방정부 인구조사에서 본 교회에서 기숙한 본 교회 간사인 허 규 그리고 문알렌, 이종석, 배종선, 윤로이드,윤성현, 이복완, 이사무엘, 김창순 등 유학생 명단을 볼 수 있다. 

그해 9월 14일 하오 6시 30분에 김 훈의 천옥분양이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결혼식이 있었고, 이후 축하회도 있었다. 이 결혼식에 김인준 목사가 주례하였다. 그해 11월 29일 신한민보 시카고 지국 창립 축하회가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김인준 목사가 김 경과 김창순과 함께 ‘내빈의 축하사’를 담당했다. 

그해 12월 7일 시카고 한인감리교회는 명년도 목사 후보자로 김인준을 취선하여 일반 교인의 투표에 부쳤는데 김인준 목사는 선정되지 못했다. 이로써 그의 목회는 약 1년간이다. 목사 선택이 곤란한 가운데 시카고한인감리교회 이사부는 1931년 2월에 이사부 부장 염광섭을 임시 담임교역자로 선정하였고 김인준은 전도부 부원이 되었다. 전도부 부장은 강택모였고, 위원으로는 장세운, 이규용, 갈홍기, 정경옥, 문찬규, 위혜진이 더 있었다. 전도부 부장과 부원은 모두 장로교나 감리교 신학교의 신학생이었는데 이들 중에서 본 교회 예배에서 설교를 하였다.

 

귀국

김인준은 이규용과 강택모와 함께 1931년 여름에 멕코믹신학교를 졸업한 후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가 1933년 6월에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교수와 교장, 숭인학교와 숭덕학교의 이사장, 숭실전문학교 이사 그리고 평양 상흥교회 목사를 역임했다. 해방 후 이북5도 연합노회가 김인준을 승인하여 이북 지역 총회 신학교 교장이 되었는데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하기를 거절하자 1947년 1월 17일에 소련군이 김인준과 이북5도 연합노회 목사 전원을 연행하였고, 시베리아로 유배된 후 소식이 끊겼다.    

damien.sohn@gmail.com

 

09.21.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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