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학, 바른 교리가 먼저다!

CT, 마크 갈리 편집장이 명확하게 짚어주는 신앙의 기본

신앙의 기본 틀은 2가지로 '바른 가르침'(ortho-dox)과 '바른 실천'(ortho-proxis)을 말한다. '바른 가르침'이란 '어떻게 믿느냐?'의 문제이고, '바른 실천'이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가르침에 근거한 바른 삶의 실천일 것이다. 크리스처니티투데이(CT) 편집장 마크 갈리는 다시 한번 오래된 신앙의 근간인 이 문제를 명확하게 성경적으로 되짚어 준다. 한마디로, “좋은 신학 없이는 하나님도 이웃도 올바로 사랑할 수 없다”며 ‘바른 신학’, 바른 교리’가 먼저라고 말해준다(True Doctrine Doesn't Wait: Without good theology, you can't have Christlike love and compassion).

최근 한 작가의 이메일을 받았다. CT가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격려의 메시지였다. 그는 CT가 정통(orthodoxy)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설사 “아름다운” 정통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CT의 모토인 “Beautiful Orthodoxy”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정통이 아니라 orthopathy(바른 마음 또는 감정)와 orthopraxis(바른 실천)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두 가지 가장 큰 계명-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과 예수님의 사명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그것을(바른 마음과 바른 실천)을 사랑과 연합(unity)을 통해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지적은 기독교의 많은 부분에서, 특히 진보적인 다양성 속에서 널리 퍼지고 있는 혼동을 거의 완벽하게 요약한 것이다.

이러한 혼동이 생긴 이유는 다양하고 그 일부는 이해할 만하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다수의 진보적 기독교 작가들은 1990년대 복음주의에서 나왔다. 그 복음주의가 율법주의적이고, 모호하고, 그리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거부돼 마땅하다.

그러나 오류에 대한 반작용은 왜곡된 신학을 만들어낸다. 로버트 배런(Robert Barron)은 “그리스도의 최우선 사명: 포스트-자유주의 가톨릭을 향하여”(The Priority of Christ: Toward a Post-Liberal Catholicism, Baker Academic, 2016)에서 자유주의와 중세 후기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초기 근대주의는 기독교 문화 안에 있는 억압적이고 반계몽적인 흐름에 대한 건강한 대응을 자처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의 부패에 반응하면서, 그 자체도 비슷하게 왜곡되고 비대해졌다.” 건강하지 않은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일부 반작용도 이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orthopathy”는 다양한 정의가 있는 용어인데, 복음주의 맥락에서는 보통 올바른 마음과 자세를 가리킨다. 그리고 “orthopraxis”는 바른 실천을 가리킨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하며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아름다운 정통”이라는 우리의 표어도 이것을 분명하게 표명한다. 그런데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윤리적인 권고로 넘어가기 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신학을 확실하게 정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sexuality) 정체성은 우리 시대를 갈라놓은 가장 대표적인 쟁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누군가의 이해 방식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에 대한, 계시에 대한, 그리고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교리에 따라 달라진다. 이에 대한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요약은 CT 내부 문서에 잘 표현돼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성경에 가르침에 기초해 그리고 특별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신약에서 확인하고 강조한 구약의 가르침에 기초해, CT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됐음을 믿으며, 그리고 성적 표현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하도록 남자와 여자의 언약관계 안에서 이뤄져야 함을 믿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적 존재로서의 우리 존재의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현실 안에서 살아야 하며(바꿔 말하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혼생활 밖에서 이뤄지는 모든 성적 표현을 거부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장려하고 권고해야 한다. 성적인 생활은 사적인 선택의 문제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결국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보다 더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천국 도성에 살게 된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신다(“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그 도성 바깥에 어떤 사람들이 남아 있는지 말씀하신다.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계

이 말씀의 핵심은 죄의 목록이 아니다. 죄의 습관에 빠져 있으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 영혼이 위험에 빠진다고 분명하게 경고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실제로 어떻게 보여주셨는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고 복종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지, 이 진실을 우리가 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곧장 달려 나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외쳐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민감하게, 지혜롭게, 인내심을 갖고 이웃들과 계속 만나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녀로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존중한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희망, 곧 하나님께서 교회에 보여주신 길과 진리와 생명의 현실을 그들에게 설명해줘야 한다.

결국, 바른 실천(orthopraxis)을 강조하면서 바른 정통교리(Orthodoxy)를 재껴두어서는 안 된다. 정통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확고한 기초다.

 

07.2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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