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옥형은 1884년경에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4년 7월 8일에 20세의 단신으로 몽골리아 선편으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2년 후 남가주 레드랜즈 공립회원으로 가입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 북가주 새크라멘토(삭도), 남가주 리버사이드(하변)을 거쳐 1908년 10월에는 남가주 클레어몬트의 한인 학생양성소에 입학하고 지역 공립학교 6반(6학년)에 입학했다. 4개월 후인 1909년 2월에 하변으로 이주한 그는 레드랜즈와 로스앤젤레스(나성)와 중가주 롬폭을 거쳐 1910년 6월에 공업을 공부하기 위하여 다시 나성으로 이주했다.
그는 철새처럼 이곳저곳을 다니면 노동하면서도 공부와 기부에 힘썼다. 신한민보가 임시 휴간하자 5달러를 기부했고, 신한민보 식자기계 구매를 위하여 50달러의 거금을 기부했다. 엎랜드 병원에 입원한 길 원의 병원비를 위하여 55달러를 기부하였는데 신한민보는 ‘의리로 재물을 던짐이 가히 동포사회에 바람을 끼칠 만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1915년 이옥형은 삭도로 이주하고, 이듬해 2월 국민회 북가주 삭도 지방회가 그를 구제원으로 임명한 것은 이상할 리 없다. 그해 8월에 신한민보를 위하여 50달러를 기부하는 등 동포 사랑과 나라 사랑을 잊지 않았다. 이옥형이 1916년 4월 13일에 기고한 아래의 “경쟁 시대의 한인의 실업”에서 위험한 풍요를 넘어 넉넉한 생존에서 그의 기부를 통한 민족 사랑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나라마다 그 민족을 위하고 사람마다 그 나라를 위하여 평안한 복락을 구할 새 각기 진화의 속력을 다하여 화불 같은 눈을 두르며 철장 같은 팔을 휘둘러 서로 앞서 나아가며 먹을 것을 다투나니 이것이 이른바 생존경쟁이라. 우리가 다행히 이 시대에 생존하였은즉 남과 같이 경쟁하여야 남과 같이 생존하리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향하여 먼저 경쟁 수단을 시험하는 것이 급무라 할까?
나라가 부하고 백성이 평안한 복락은 반드시 실업으로 좇아 생기나니 우리가 이때를 당하여 생존문제를 순서대로 해결하고자 할진 데 실업을 먼저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노라. 그러나 한 가지 큰 의문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능히 실업을 잡고 오늘날 새로운 무대에 나가서 남과 한가지로 경쟁할 만한 지혜와 식견과 도량과 능력과 재력이 있는가? 아니라. 만일 우리가 이상 몇 가지를 갖출 것 같으면 벌써 남과 같이 경쟁하는 마당에 뛰어나와 저 우등지 위에 처한 자의 어깨를 치며 달음질을 시험할지라. 무슨 연고로 팔짱을 꽂고 벽 위에 앉아 남의 사업만 구경할 까닭이 있으리오. 그런즉 한번 승전하기를 헤아린 연후에 동병하는 것이 지혜로운 장수가 아니라. 백번 싸워 백번 폐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려운 것을 견디며 험한 것을 무릎 쓰고 담력을 내어 적병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 참으로 용맹스러운 장수이니 그런고로 용맹한 자가 아니면 감히 경쟁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라. 우리가 부족한 것을 겁내고 스스로 퇴축한 즉 이 시대에 남과 같이 생존하기를 바라지 못하리라 하노라.
그러나 실업은 헛된 언론과 헛된 사상으로 경영할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는 것이라. 실지에 나아가 견습하며 경험하며 연구하여 남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가 먼저 발명할 재능이 있고 난 뒤에야 가히 이익을 도모할지니 20세기의 경쟁 실업이 그 어찌 쉬운 일이라 하리오.
경쟁의 본의는 내가 남보다 우월하고 특출하여 남의 앞에 나아감으로 승리로 삼는 것이라. 그러나 금일에 경험하여 보건대 저 전쟁에 수단이 숙련한 자들은 그 행동이 자못 괴상하여 저희가 남보다 잘하고자 할 뿐 아니라 남이 잘하는 것을 시기하여 사업을 실패시키고자 하는 악마의 수단이 심히 간사하며 공리가 능히 이를 금지할 수 없는지라. 이러한 경우를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남과 같이 경쟁할만한 정도에 있을지라도 필경 실패를 면할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국권이 없으므로 인하여 모든 세력이 따라 없어져 어디를 가든지 용납함을 얻기도 어렵고 설혹 사업에 착수할지라도 악마의 저의를 피할 수도 없는지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이 시대의 위험한 풍요를 면하고 넉넉히 생존함을 얻을까? 사람마다 다 각기 한번 연구하지 아니치 못할 하나의 큰 문제라 하노라.”
이옥형은 1916년 10월 3일 오후 8시 30분 상항 예배당에서 이대위 목사의 주례로 차이나 선편으로 상항에 입항한 서영애와 결혼한 후 남녀 동포 50여 명을 상해루에 초대했다. 그는 삭도에서 이전에 하던 이발소 사업을 계속했고, 이듬해에는 제3가 길(스트리트) 1020번지에서 사업을 확장하여 이발소 외에 목욕탕과 세탁소를 운영했다.
삭도 한인교회 전도사
1928년 9월 3일 상항 부쉬 스트릿 916번지 남감리교회 예배당에서 감독 샘 헤이 박사의 사회로 열린 미국 남감리교 연회에서 이옥형은 삭도 한인교회 전도인으로 임명되었다. 오클랜드와 삭도의 순회 목사인 임정구가 방문하지 않을 때는 이옥형이 예배를 인도하였고, 심방 등 목회를 담당했다.
그는 한국 수재 구제금, 이대위 목사 유족 구휼금, 삼일절 행사, 국어학교 운영, 전명운 부인 장비 등에 교회를 대표했다. 그가 전도인으로 임명되기 4개월 전에 예배당이 P거리(스트리트)에서 제6거리(스트리트) 1815번지로 옮겼다. 그는 후자의 예배당에서 교회를 섬기게 된다.
그해 삭도 성탄절 행사에서 이옥형이 사회를 보았는데 전도인이 아니라 권사로 소개된다. 찬송가 제7장을 합송하고, 박중만이 기도한 후 사회자가 성경낭독을 하였고, 이정두가 바이올린 독주를 했으며, 유년부 학생들이 찬송가를 합창했고, 김지식이 개회사를 담당했다. 학생 일동이 찬송가를 합창한 후 정몽룡의 연설이 있었다. 학생들이 성경 요절을 암송하고 구주 성탄 역사를 소개한 후 찬송가로 합창했고, 박중만과 이정두가 감사담을 나누었다. 이정두가 독창한 후 김복난이 스페인 노래로 독창하였고, 찬송 3장을 부름으로 성탄절 행사를 성황리에 마쳤다. 그리고 시상이 있고 난 뒤 산타클로스가 등장하여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1929년 9월 17일 오전 9시에 버클리 웹윗 남감리교회당 응접실에서 샘 해이 감독의 주관으로 연회가 열렸다. 이날 이옥형은 삭도 한인교회 전도사로 연임되었다. 성탄절 행사에서 감상담 순서를 맡아 정몽룡과 허 은과 더불어 이옥형이 감사 말씀을 나누었다. 한 달 전 그의 아들 이야곱이 외국 아이들과 놀다가 포르투갈 아이가 쏜 사냥총에 맞았으나 대낭을 조금 스쳤을 뿐 생명에 위험이 없었다는데 이를 두고 감사했을 것이다. 새해에 들어서서 이옥형은 상항 한인교회 새 예배당 건축 예배와 삼일절 기념식 등의 행사에 교회를 대표했다.
1929년에는 오클랜드와 삭도를 합쳐서 출석 교인이 62명이었다. 이 62명 중에는 성탄절 행사에 참여했던 김복난, 김지식, 박중만, 이정두, 정몽룡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기부
1930년 이후 그는 전도사역에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옥형의 큰 기부는 해를 거듭하면서 다양하면서도 계속되었다. 임정구 목사 모친 장례에서 비석 세우는 비용과 상항 교회가 돌보는 고아원에 터키 한 마리를 보냈고, 신한민보사의 영문 주자 매입을 위하여 50달러를 기부했다.
이 외에도 한국학교, 김성수의 장례 행렬 참가 특연금, 재만 동포 구제비, 내지 수재 동정금,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임시정부 후원금, 국민부담금, 총회관 건축의연금, 삼일절 성금, 박양래 장의금, 삼일절 기념금, 의무금, 50달러의 특별위연, 내지 한재 의연, 신한민보 식자기계 의연, 광복군 후원금, 나성 한인 양로원 기금, 국어학교 의연금, 독립금, 상항 승전 행렬 참가비와 의무금, 원정 사관 후원비에 동참했다.
1934년 이전부터 이옥형은 서양 식당을 경영하였는데 밤낮 개업하고 매일 수백 명의 식객이 출입하였다. 그는 한 사람에게 돈을 많이 남기지 않고 여러 사람에게 이익을 조금씩 나누기로 생각하고 사업을 하였는데 그가 ‘밥 먹을 시간과 잠잘 시간도 넉넉지 못하고 명절날도 없으나 돈은 그렇게 남질 않는다’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식당에 동포 4, 5인을 고용하였고 더욱 고마운 것은 가출옥한 한두수에게 일자리를 주었음에 있다.
20세 도미 후 이곳저곳서 노동하면서도 공부와 기부에 힘써
삭도한인교회 전도인으로 2년 재직, 군사운동으로 독립 주장
군사 운동을 통한 독립
국민회 삭도 지방회 회장을 역임하고 1943년에 국민회 제7차 대표대회에서 한인 정치단체의 통일을 꾀했던 중앙집행위원 15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이옥형은 1947년에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고, 1950년까지 김 호와 송헌주, 한시대 그리고 김용성 등과 함께 북미지역 국민회를 이끌었다. 1944년 1월 27일에 기고한 아래의 “우리의 당면한 문제”에서 그의 군사 운동을 통한 독립을 보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의 참사람이 되자! 그리고 살길을 찾자! 또 산 사람이 되자! 인격으로 사상으로 꾸준하고 튼튼한 개성의 사람이 되자! 주의에 철저하고 직무에 충실하자! 내 재주보다도 내 이름보다도 내 이익보다도 일보를 진하여(나아가) 직무에 충실한 개성이 되자! 내가 스스로 서고, 내가 나를 붙잡고 나아가는 것을 고집하자! 하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러나 생각할 것은 나 혼자만 따로 서려고 고집해서는 오히려 될 수 없다. 한 덩어리면 살고 각립하면 죽는다. 동포여! 같이 조선 국가를 건설하자! 이 대사업을 성취하는데 금일 우리의 당면한 급무는 군사 운동이다. 군사 운동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할 것이라고 나는 확실히 믿는다.”
damien.sohn@gmail.com
05.04.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