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지난 8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였다. 따듯한 어머니 리더십을 보여 준 여왕의 죽음으로 영국민은 물론 세계 많은 사람이 애도하고 있다. 지금 영국에는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이고 있고 19일로 예정된 장례식을 비롯하여 언젠가 치를 촬스 3세의 대관식등 영국 왕실에 대한 관심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동서고금 모든 왕실에는 권력과 명예와 재물, 그리고 온갖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이 가득 찬 곳이다. 모든 왕실의 역사를 보면 그 찬란함 이면에는 한계와 갈등과 아픔도 있다. 특히 영국 여왕이 그랬다. 여왕의 재위 70년 동안 그가 주도적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왕 가정 안에 볼썽사나운 다툼과 불거진 갈등의 소식도 끊임없었다. 사람들이 영국 왕실에 관심을 두긴 하지만 그곳이 이 시대를 위한 소망의 자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다르다. 왕실에는 진정한 소망이 없고 그 안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번연히 알면서도 자신의 삶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왕실 같은 삶으로 치장하고 지향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내용이야 어떻든 왕실이 받는 주목처럼 자신도 이 세상에서 다른 이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은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가 왕궁에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분명히 일러주셨다. 그곳을 동경(憧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왕궁에 비해 광야는 어떤가. 왕궁의 화려함은커녕 기본적인 먹고 입고 잠잘 곳도 마뜩잖은 곳이 광야이다. 위험하고 쓸쓸한 빈들이 광야다. 아무도 광야를 주목하지 않는다. 누군가로부터 따듯한 위로나 살가운 연락도 없다. 인간적인 기대는 번번이 실망으로 끝나는 곳이 광야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광야의 영성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눅7:24-26) 예수님은 광야에서 선지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광야에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선포하는 선지자와 같은 영성이 우리 모두에게 옳고 필요하다.
광야는 나의 선택이나 우연히 이르게 된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는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이다. 광야가 어떤 곳인지 온 삶으로 체득한 어느 신앙인의 고백을 들어 보시라.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그렇다. 광야가 하나님이 택하여 보내신 곳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이다. 보내신 그곳은 사명이 있는 곳이기에 무료(無聊)한 곳일 수 없다.
기독교의 역사는 왕실의 고고(孤高)한 외양(外樣)을 기술(記述)한 것이 아니다. 광야의 고독(孤獨)한 눈물을 잉크 삼아 기록했다. 왕궁을 버리신 광야의 예수님처럼 광야를 걷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었다. 왕궁을 꿈꾸지 말자. 광야를 사모하자. 이 땅의 왕궁은 자신만을 돋보이게 하려다가 곧 피폐함을 맛볼 곳이요, 이 세상의 광야는 하나님만 의지하다가 곧 천국에 이르게 될 곳이다.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왕궁에 있지 않고 광야의 영성을 가진 그대이다.
09.17.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