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새해가 시작되었다. 누구나 새해는 설레는 마음으로 맞는다. 비록 새해에도 암울한 오미크론의 터널이 이어지고 있지만, 곧 그 끝이 보이든가 적어도 그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오미크론이 인류가 맞는 문제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새해에도 수없이 크고 작은 문제들이 개인과 공동체 앞에 줄지어 서 있고 또 등장할 것이다. 인생은 문제의 반복 속에 헤매다 일생을 마치는 존재인가. 역사는 돌고 도는 윤회(輪廻)인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사상이나 정권이 또는 경제나 기술이 인류의 행복을 약속해도 그것은 거짓 소망이다. 언제 어떤 사상이 인류의 진정한 위로가 되었던가. 언제 어느 시대 어느 정권이 인생의 아픔을 오롯이 품었던가. 부침(浮沈)이 심한 경제나 기술도 인류 난제(難題)의 해결사가 될 수 없다.
여기 진정한 소망이 있다. 여기 완벽한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이미" 와 "아직"의 역사관 속에 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인데 그러므로 지금은 "이미"와 함께 "아직"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미" 와 "아직"의 사이를 말세라고 부른다. 우리는 말세를 산다. 이 말세를 잘 살아내야 하고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마귀는 "이미" 와 "아직"의 말세 가운데 사람들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유혹과 위협을 끈을 놓지 않는다. 마귀는 예수님 부활의 아침 이미 정수리가 으깨어진 존재. 그런데 여전히 대단한 영향력을 끼친다. 학교폭력이 대단한 어느 교실로 가보자. 그 교실에서 깡패 같은 학생이 그 반 아이들을 괴롭힌다. 때리고 돈도 뺏고 무엇을 사오라고 돈도 안 주고 시킨다. 모두가 힘들어하던 때에 정의(正義)로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그 깡패 학생은 선생님으로부터 교실 앞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두 손 들고 있게 되었다.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이 교무실로 데리고가 완전 끝장을 볼 참이다. 그런데 아직 수업 중인 시간, 선생님의 통제 아래 있는 깡패가 벌을 서면서도 선생님 눈치를 살짝살짝 보면서 그 반의 학생들을 이리저리 째려보고 뭐라고 폭언(暴言)도 하고 있다. 그 반의 학생들은 선생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벌서고 있는 깡패를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 있다. 이 무슨 비극인가. 이 비극은 교실에서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모든 세상의 모습이다. 초림의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미 마귀는 결박되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영원한 고통의 자리로 들어갈 것이다. 왜 마귀에게 계속 흔들리고 있는가.
이 말세,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을 잘 살아가라고 약속의 성령은 오셨다. 성령은 개인을 거듭나게 하고 능력도 주고 열매도 맺게 할 뿐 아니라 교회에 부어져서 각양 은사로 섬기게 하신다. 성령은 "이미"와 함께 물 붓듯이 부어졌고 "아직"의 때까지 계속 부어지고 부어질 것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이미 오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잘 깨닫게 해준다. 이미 일어난 일들로 기뻐한다. 이미 이루어진 풍성한 것들을 지금 마음껏 누리라고 하신다. 성령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들을 기대하게 해준다. 그날까지 마귀의 유혹을 넉넉히 이기도록 힘주신다. 성령은 이미 시작된 구원을 완성시켜 주실 것이며 이미 맛보고 있는 하늘의 유업과 아브라함의 복을 완성시켜 주실 것이다. 여러 어둠의 걷히지 않은 새해, 두려워 말자. 그날까지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이미 진정한 소망과 완전한 해결책이 있지 않은가. 자, 함께 노래하자.
억눌린 자 갇힌 자 자유함이 없는 자/ 피난처가 되시는 성령님 계시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참자유가 있다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우리 인생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서/ 그 나라 꿈꾸게 하시네
01.01.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