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위선의 사회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동생 아벨을 죽이고도 시치미를 떼는 폭력과 위선의 사람 가인에게 하나님이 물으셨다. 그 이후로 인류 역사에는 폭력과 위선이 그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온 세상에 만연한 폭력과 위선의 모습을 보고 있다. 며칠 전 한국의 1심 재판부에서는 입양한 딸을 폭력으로 죽게 한 양모(養母)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지난 4월 달에는 일 년 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눌러 숨지게 한 경찰관에 대한 유죄판결을 배심원이 내렸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는 BML운동이 일부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시안에 대한 무차별 폭력은 또 어떠한가. 미얀마, 이스라엘 등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참담하다. 지도자와 공직자들의 위선은 그들의 인사청문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빌 게이츠의 성적 폭력과 그동안 그의 이미지를 포장했던 위선은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교회도 예외이지 않다. 교회 안에 물리적 폭력은 드물지만 성적폭력의 소식은 잊힐 만하면 들려오고 언어적 폭력과 고도의 위선은 드물지 않게 보고 듣는다. 

 

폭력과 위선의 일상화로 더 이상 이 일로 스스로 아파하거나 서로 상처받지 않는 시대가 된 듯하다. 그러니 서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민망하게 물을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어떤 이는 목청을 높인다. 이렇게 하자, 저러면 된다고 폭력과 위선을 잠재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폭력과 위선을 바라보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점이 전혀 다르다. 그것을 해결하려는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노벨상을 받았던 프랑스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고도가 끝내 오지 않듯이 폭력과 위선을 완전히 잠재울 분을 없고 따라서 그를 기다릴 필요는 없는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힘써 데모하고 힘 모아 혁명을 해야 하나? 아니다. 폭력과 위선을 성향을 은근히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폭력과 위선의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 그러므로 데모와 혁명 대신 기다려야 한다. 왕의 귀환(歸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분이 반드시 다시 오신다. 폭력과 위선을 심판하실 그 분이 오신다. 우리는 그 날까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 날까지는 이렇게 산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찾아온 폭력 앞에 칼이라는 폭력으로 맞서려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또 예수님은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를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一喝)하셨다. 폭력과 위선의 가이사의 왕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폭력과 위선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성공과 행복에 목을 걸고 사는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늘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의 폭력과 위선을 해결 하라는 부르심보다 이런 곳에서 예수님의 생명과 그 분을 믿는 그 신앙의 고귀함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것은 십자가다. 폭력과 위선을 전략으로 일삼는 십자가의 원수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그 날까지는 십자가로 산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문이시다. 얼버무리지 말자. 폭력을 물리치고 위선을 부끄럽게 만드는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고 살았습니다” 라고 답변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05.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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