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삶은 우리를 수 없이 속인다. 삶이 내 생각대로 기대대로 흐르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경우 언제부터 외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시킨”형(兄)의 시가 떠오른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에는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시킨 형(兄)의 풀네임(full name)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다. 얼마 전 한국의 유명한 가수 나훈아씨가 그의 노래 가운데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테스”형(兄)이라고 부른 것이 흥미 있어 나른한 봄날 잠시 패러디한 것인데 기분이 언짢은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가수는 그 노래에서 “테스”형을 찾으면서 삶에 대해 자조적(自嘲的)인 질문을 던진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그러나 “시킨”형은 삶을 그 가수처럼 그렇게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시킨”형은 삶이 자기를 속일 때 참고 견디자고 한다. 더 좋은 미래를 바라보자고 한다. 오늘의 고통은 곧 사라질 뿐 아니라 훗날에는 그리울 것이라고도 너스레를 떤다.
그렇다. 다가온 삶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고통을 상처로 잘(?) 만들고 그 상처를 내 마음 안에 견고한 진(陣)으로 구축(構築)하여 수시로 불평과 불만으로 지새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화려한 자수(刺繡) 만들어 축복으로 누리자는 “시킨”형 같은 사람도 있다. 아시지 않은가. 고통 속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 이름들은 기회와 선택과 도전들이다. 엄청난 기회와 선택과 도전이 고통 속에 풍성히 담겨있다. 독일어성경은 루터가 숨어있던 바르트부르크 성의 골방에서 번역되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지어졌고 헨델의 메시야는 절망에서 만들어졌다. 루터, 번연, 헨델은 각각 극심한 고통에서 놀라운 기회를 얻었고 그들은 모두 긍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선택을 향해 도전하였다.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도전이었다. 그들이 고통 중에 붙잡은 기회와 선택과 도전은 실로 자기 자신을 살렸을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큰 자산이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아름답게 올려드린 영광이 되었다.
기회와 선택과 도전은 평범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삶의 고통이라는 차가운 우물에서 건져 올린 시원한 선물들이다. 고통으로만 끝나는 고통은 없다. 무의미한 고통도 없다. 고통 때는 움츠릴 일이 아니라 두루두루 살펴 기회를 찾을 일이다. 고난과 함께 찾아오는 결정적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서야 어찌 되겠는가. 2차 세계대전 때에 영국의 크레이턴 메이브램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사방으로 포위당하였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된 것이다. 부대원들은 다 절망 속에 빠져 공포에 떨고 있었다. 메이브램 장군은 낙심하지 않았다. 낙담 대신 “장병들아, 이 전쟁이 시작된 이후 우리는 지금 처음으로 적을 사방으로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외치며 용기를 내라고 독려하였다.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다시없을 기회를 바라본 장군의 안목이 놀랍다. 그 휘하(麾下)의 군대는 어떻게 했을까? 놀라운 기회에 용기를 선택해 전투에 나섰고 싸웠고 이겼다. 고통이 기회로, 기회가 선택으로, 선택이 도전으로, 그리고 도전이 승리가 되었다. 승리자들에게 그 고통은 추억이 된다. “시킨”형이 떠난 지 아주 오래되었다 그래도 그 형의 시는 오늘도 적절하고 유효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04.1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