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사라는 여기 없다. 아내 사라가 없다.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 사라와 같이 테이트 할 수 없다. 아침에 함께 티(tea)를 마시면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던 그들의 오랜 여정 이야기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다. 아브라함의 슬픔과 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창세기 23장 2절은 이렇게 일러준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잘 들어보시라. “슬퍼하며 애통했다. 오래오래. 그리고 아브라함도 죽었다”가 아니다. 3절에 계속된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아브라함은 슬픔을 딛고 일어났다. 다시 삶의 현장으로 나갔다. 그에게는 부활의 믿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모리아 산에서 바치려 했을 때 그 믿음을 보였고 자신의 그 믿음이 옳았음을 생생히 경험했다. 여기 있던 분들이 지난 한해를 지나면서 이제는 여기 없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 그 분들을 다시는 가정이나 병원으로 심방할 수 없다. 교회의 예배에 다시 오실 수 없다. 놀랍고 분명한 것은 그 분들은 사라처럼 여기 없는데 사라처럼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으시다는 것이다. 사라의 없음은 부활의 있음을 알려준다.
사라는 여기 없다. 엄마 사라가 없다. 학교 갔다 돌아와도 나를 맞아줄 사라는 없다. 저녁을 지어놓고 내 이름을 부르며 “와서 밥 먹어라” 말할 사라는 없다.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니 이사라 집사님은 여섯 살 반이 된 나를 두고 떠나셨다. 4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님의 장례식 때에 그 날 나는 춤을 추었다. 한 손에는 개나리 한 손에는 진달래를 꺾어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다고 훗날 어른들이 들려주었다. 내가 너무 조숙(早熟)했나? 그 나이에 벌써 성도의 죽음을 축제로 이해했다는 말인가. 사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픔과 애통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어렸다. 나의 어머니 사라께서 사라지신 후, 나는 천국이 너무 그리웠다. 사라, 그 분을 빨리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곁을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나셨냐고 물어볼 요량(料量)이었을까. 놀랍고 분명한 것은 어머니 사라는 여기 없으신데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여기 계시다는 것이다. 사라의 없음은 임재의 있음을 알려준다.
사라는 여기 없다. 딸 사라가 없다. 지난 12월 23일. 사라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스물 네 살의 사라는 사랑하는 아빠와 엄마, 언니와 동생 그리고 우리 모두를 뒤로 한 채 떠났다. 이 땅에서 그 다섯 식구가 같이할 식탁은 이제 없다. 어디론가 여행할 때 모두 같이 가도 이제는 넷 밖에 없다. 간호사였기에 일어나 병원으로 출근해야할 그는 그 날,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고 돌볼 환자가 아무도 없는 천국에서 깨어 일어났다. 부모는 산에 묻고 자녀는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자녀의 죽음이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이라고도 한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 고통을 친히 맛보셨다. 나는 몇 날 동안, 사라 부모의 고통을 보았고 들었다. 그 슬픔과 애통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놀랍고 분명한 것은 짧은 삶을 마감한 사라는 여기 있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사라의 없음은 구원의 있음을 알려준다.
사라는 여기 없다. 아내 사라도 없다. 엄마 사라도 없다. 딸 사라도 없다. 사라의 빈자리는 크다. 그러나 사라의 없음은 하나님이 없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없음이 오히려 선명히 드러내는 것이 있다. 사라의 없음은 환히 보여준다. 부활, 임재 그리고 구원을. 아~ 나의 사라는 어디 있나. 혹 나의 사라가 여기 없다하여도 슬퍼하고 애통하지만은 말자.
01.1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