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이야기가 한국의 홍길동전에 나온다.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그보다 더 비극적인 이야기가 미국에도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라 부르지 못하고 홀리데이라고 부르라고 강요받았었다. 카드도 Merry Christmas보다 Happy Holiday라는 이름으로 잔뜩 만들어져 있었고 쇼핑몰마다 성탄절이 홀리데이라는 이름으로 장식되어 있곤 했다. 진정 그렇게 부름이 특정종교만 즐기는 날이 아니라 모든 인종이 즐겁게 보내자는 정치가들이 알량한 배려였던가.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홀리데이라는 이상한 단어와 바꿀 수 없다.
사실 나도 그 노래를 좋아했다. “I'm dreaming of a white Christmas....” 감미로운 노랫말과 멜로디에 쏙 빠져 매년마다 성탄절에 눈이 왔으면 하고 얼마나 바랬던가. 크리스마스에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되고 나의 일 년 동안의 더러움 덮이고 또 예쁜 여학생과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위로 뽀드득 뽀드득 첫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걷고 또 걸어보길 꿈꾸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하얀 눈의 꿈과 바꿀 수 없다.
크리스마스에는 정말이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믿고 싶었고 그가 가져올 선물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루돌프 사슴이 끄는 마차를 타고 착한 아이들을 찾아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에 성탄절 며칠 전부터는 착하게 살려고 애쓰기도 하지 않았던가.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선물이야기도 가슴에 저몄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가난한 부부가 서로에게 선물을 사주려고 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시계가 있는데 시계 줄이 없기에 시계 줄을 선물하려고 했다.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운 긴 머리를 빗을 머리빗이 없기에 그것을 사주려고 했다. 아내는 머리칼을 잘라 팔아 남편의 시계 줄을 샀고, 남편은 자기의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빗을 샀다. 그날 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저녁을 먹는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오 헨리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감동이 되곤 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그 어떤 비싸고 멋진 선물과 바꿀 수 없다.
매년 크리스마스 전후로 맨해튼 록펠러센터 앞에는 크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번쩍인다. 팬데믹 때도 예외는 없다. 우리 동네에서도 벌써부터 볼 수 있었는데 몇 집 건너 어느 집 앞에의 성탄트리는 그 집 앞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의 다른 집, 상점, 여러 빌딩 앞에서도 볼 수 있다. 밖은 아니더라도 우리 교회당 안에도 우리 집 안에도 2020년 성탄트리가 세워졌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어떤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탄트리와도 바꿀 수 없다.
크리스마스에 간과할 수 없는 풍경은 구세군 자선냄비를 앞에 놓고 딸랑딸랑 종을 치는 모습일 것이다. 그 소리를 좇아가 이웃을 돕는 마음을 담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구제하는 날로 바꿀 수 없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비장(悲壯)한 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전무후무(前無後無) 날이다. 구원이라는 인류 최대의 소망(所望)이 임한 날이다. ‘엿장수 맘대로’ 라는 말이 있다. 어느 누구도 고귀한 크리스마스를 엿장수가 맘대로 엿을 바꾸어주듯 다른 것과 함부로 바꿀 수 없다. 물론 우리도 자기 맘대로 엿을 잘라주는 엿장수 같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는 안 된다
12.12.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