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면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그렇게 여름은 지났다. 이제 9월이다. 가을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 날 이후 나는 가을의 문턱을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리라.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다. 그날 저녁부터 교회에서 있을 세미나의 강사 목사님을 맞으러 뉴저지의 뉴왁 공황을 향해 아침 일찍 가던 길이었다. 맨해튼을 통과해가려는데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벌어졌다. 분주한 사이렌 소리가 끝이지 않았고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의 다급한 행렬이 이어졌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어갈 때 무슨 일이 벌어져도 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점차 방송을 통해 비행기 테러가 도처 있었음을 듣게 되었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눈앞에서 그리고 맨해튼을 빠져나가 뉴저지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 날 밤늦게 교회로 돌아왔다. 청년들을 비롯 교우들이 본당에 가득히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 청년들 중에 그날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에 출근한 두 명이 연락이 안 됨을 알았고 그 중의 한명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날 수천 명이 죽고 오늘까지 많은 후유증이 이어지는 9.11이 가을 문턱에 있어 매년 가을로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 

가을이 오면 내겐 수십 년 전의 향기가 찾아온다. 모교 고등학교에서 매년 가을에 국회전시회가 있었다. 국화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그렇게 다양한 색깔이 있는 줄, 그토록 진한 향기를 내뿜는 줄 예전에 몰랐다. 그 때 그 국화 옆에서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를 떠 올리기도 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며/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다양한 색채의 국화 향기는 다섯 누님들의 향기였다. 내게는 누님이 다섯 분이 계시다. 한 분은 천국에, 네 분은 이 땅에. 국화 향기와 누님들의 신앙 향기가 나를 적시는 가을이다.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다. 찬바람 이는 가을은 속물 같이 끈적끈적하게 살았던 여름 삶을 내려놓고 영혼을 맑게 정화시켜야 할 기도의 계절이 아니던가. 그래서 김현승 시인의 가을 기도가 이제는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그렇다. 기도 없이 가꾸어질 가을의 열매는 아무 것도 없다.

늦가을에는 김장을 해야 한다. 동네 집집마다 쌓아둔 배추를 오늘은 이집 내일은 저 집에 몰려가서 배추를 소금물에 절구고 빨갛게 속을 버무려 장독에 차곡차곡 쌓아 겨울을 준비하는 김장의 계절이 가을이다. 그렇다. 겨울 맞을 채비 없이 단풍 구경만하고 가을을 보낼 수는 없다. 우리 삶에 가을이란 계절이 있음은 영적으로 얼마나 유익이 되지는 모른다. 하나님 만날 준비가 필요함을 일깨워주는 가을이 나는 너무 좋다. 가을이 뚜렷이 없는 동네에 사는 분들에게 괜히 미안하다. 그러나 그곳에는 항상 온화함과 쾌청함이 있지 않은가. 

09.0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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