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아프다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어떤 사람은 그 당시에는 집 안에 있어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밖에 벌어진 일들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쓰러진 나무들, 끊어진 전선들, 무너진 집들... 얼마 전 뉴욕에 짧게 불었던 폭풍(storm)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필자의 집도 불이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불이 나간 교우들의 집이 꽤 있었다. 불이 나가니 불편한 일이 한 둘이 아니었다. 몇 날 계속되면서 불편을 넘어 고통이 되었다. 곳곳에 넘어진 나무 때문에 거리에서의 혼돈도 적잖이 있었다. 닷새 만에 다시 집에 불이 들어왔다. 무엇부터 하였겠는가.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고 냉장고 안의 상한 음식을 정리하였다. 무질서의 집안을 인정하고, 상한 식물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 아픔이 빛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어둠이 빛을 처음 만날 때는 아픈 이유는 그동안 빛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다. 어둠은 빛을 만나면서 아프다고 그 빛을 피하여 더 짙은 어두움으로 내려갈 수 있다. 슬픈 일이다. 

영화 “초원의 빛”은 버드와 월마의 아픈 사랑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영화 제목에는 “빛”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영화 내용은 왜 아플까? 모든 빛이 그렇듯이 사랑의 빛도 처음에는 언제나 아픔을 담아 오기 때문이리라. 읠리엄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은 이렇게 쓰여 있다. “한때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만/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존재의 영원함을/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죽음마저 꿰뚫는/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놀랍다. 슬픔을 가지고 온 초원의 빛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삶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죽음까지 꿰뚫은 빛이 되는 것을 본다. 빛은 처음에 아픔을 주지만 그 아픔에 웅크리지 않고 그 아픔을 딛고 나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여리고 성의 바디매오를 보라. 그는 앞을 보지 못하였다. 그의 인생은 버려진 존재와 같았다. 그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빛을 만나는 장면이 맨 처음에는 매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방해가 있었다. 업신여김이 있었다. 바디매오가 얼마나 서러웠고 아팠겠는가. 바디매오는 그 방해, 그 설움, 그 아픔을 떨치고 나아가 영원한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그 눈을 뜨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익숙했던 어두움의 삶을 던져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빛은 이처럼 처절한 아픔을 넘어 찬란한 치유를 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빛을 처음 만나는 어두움만 아픈 것이 아니다. 빛 자체도 아프다. 빛을 밝히기 위해 타야하는 아픔이 빛 자체에게 있다. 촛불도 호롱불도 빛을 밝히기 위해 심지가 타야하는 아픔이 있다.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아픔 없이 또는 희생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빛은 이래저래 아픈 것이다. 빛의 아픔을 빛도 잘 견뎌야 하고 어둠도 잘 감당해야 한다. 빛이 없는 세상은 고통의 세상이다. 빛의 아픔은 세상의 고통을 물리치고 치유의 세계로 이끈다. 어디선가 들려오지 않는가.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08.1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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