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우리에겐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그리고 촉각이다. 이 다섯 가지가 가장 잘 쓰여야할 영역은 어디일까? 나 홀로 즐기는 데? 남을 괴롭히는데? 죄를 짓는 데? 그럴 수 없다. 우리의 오감은 감사의 영역에 아름답게 쓰여야 한다.
감사의 시각(視覺)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장에 하와는 탐욕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실 때 그들은 광야에 “없는 것”만 보았다.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다윗은 고적(孤寂)한 들녘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노래했다. 전자(前者)는 불평의 눈을, 후자(後者)는 감사의 눈을 가지고 살았다.
지휘자 윤학원 장로님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지휘에 맞춰 노래하는 연주자 같다. 하나님의 지휘에 따라 한 박자, 한 박자 최선을 다해 연주하다보니 어느 덧 내 삶의 마디마디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들어 있다.” 그의 일생은 저명한 지휘자의 삶이었다. 그러나 자기 인생의 악보(樂譜)조차 자기가 지휘자라는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자기 인생의 악보는 하나님이 지휘하시는 것으로 보며 감사드렸다. 우리의 시각은 감사의 시각이어야 한다.
감사의 청각(聽覺)
중학교 때 툭하면 싸움을 잘하던 급우(級友)가 있었다. 몇 차례 크게 싸우고는 다른 데로 전학(轉學) 갔다. 그 당시 그 친구를 알고 있었으나 그 친구의 싸움을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친구가 떠난 지 아주 훗날이었다. 지금까지 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친구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필요이상 컸고 싸움의 발단은 항상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되었다. 친구들의 평범한 말을 자기를 조롱하는 말로 여겼던 것이다. 열리지 않은 청각 속에 오해가 있었고 분노가 있었고 싸움이 있었다. 왜 그 친구뿐이랴. 우리 모두는 심각한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 많은 문제가 청각에서 빚어진다.
예수님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질책하셨다. 눈은 나로부터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귀는 밖의 것을 내 안으로 모은다. 그리고 그 모아진 것으로 나를 빚어 간다. 태교(胎敎)가 그런 이론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밖에 떠도는 두려움의 소리, 염려의 소리를 귀를 통해 잔뜩 모으는 자가 많다. 그런 자가 어떤 삶을 살지는 너무 자명(自明) 하다. 진짜 소리가 있다. 하늘 소리가 있다. 그 소리 듣는 데는 둔감(鈍感)하고 가짜 소리, 땅의 소리에만 열려 있다면 어찌 감사가 있겠는가. 우리의 청각은 하늘 소리에 “에바다” 되어야 한다. 그러면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청각은 감사의 청각이어야 한다.
감사의 미각(味覺)
요즘 유행하는 방송이 있다면 먹방 방송이다. 유명한 음식 평론가가 어떤 요리사(料理師)가 만든 음식을 먹고 그를 향해 맛이 어떻다고 평가하는 장면을 침을 꼴깍이며 본다. 그러나 모든 음식은 주방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배후에는 그 식재료(食材料)를 사고파는 시장(市場)의 역할이 만만치 않게 있다. 또 농부와 어부 등의 수고가 없었다면 어떻게 먹방이 차려지겠는가. 근본적으로 해와 비와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 없었다면 우리가 작은 콩 하나 제대로 먹을 수 있었겠는가. 간사해진 미각이 감사를 잃은 지 오래이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음식을 먹을 때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쳐 먹는 것과 같다.” 그러니 매 식탁(食卓) 앞에서 어렸을 적에 불렀던 노래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날마다의 양식에도 늘 감사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 예수님이 베푸신 최고의 식탁인 성찬(聖餐) 앞에서 극진(極盡)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차려주신 식탁을 보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다(We are what we eat)”라고 일부(一部) 해석해도 무방(無妨)하리라. 오~ 놀라운 영(靈)의 양식이여! 일상의 양식이든 영생의 양식이든 먹음과 감사는 분리할 수 없다. 우리의 미각은 감사의 미각이어야 한다.
감사의 후각(嗅覺)
독감 접종을 했음에도 코가 꽉 막히고 목이 따갑고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기침이 이 글을 쓰는데도 계속된다. 이번에 후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다소 문제가 있어 빵이 타는 냄새에 제대로 반응 못하다가 밖에 다녀 온 아내 덕에 하나 남은 베이글을 극적으로 살려(?) 그을음을 제거하고 먹을 수 있었다. 함께 마셨던 커피향(香)을 제대로 누릴 수 없었음을 물론이다. 후각은 너무 중요하다. 그 실체를 직접 대하기 전에 냄새가 주는 고소함과 역겨움을 맡을 수 없다면 삶의 즐거움은 반감될 것이요 위험은 급증할 것이다. 감출 없는 것이 세 개 있다. 기침과 냄새와 사랑이다. 하나님은 향취(香臭)를 좋아하신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이시길 원하신다. 삶과 냄새를 떼어 놓을 수 없듯이 신앙과 향기는 함께 간다. 우리의 후각은 감사의 후각이어야 한다.
감사의 촉각(觸覺)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에게 남아 있었던 것은 촉각이었다. 그 촉각으로 기적을 일으켰다. 그의 촉각은 세상을 만나는 길이었다. 촉각으로 세상을 배우고 그 촉각으로 무기력했던 사람들을 깨우쳤다. 그녀의 촉각은 감사를 표현하는데 다른 이들의 입술보다 더 뜨거웠다. 얼마 전에 쓰러져 아직 병원에 누워있는 여(女)집사님이 계시다. 40세가 안 되셨는데 병원에서는 거의 포기하는 듯한 말을 여러 차례 하였다. 그러한 그가 요즈음 밖에서 들려지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에 손가락으로 반응하고 있다. 때론 눈물도 흘린다. 아주 자그마한 촉각으로 벅찬 감사를 표현한다. 남편과 세 자녀, 그리고 모든 가족의 감격과 교회의 기쁨이 어떤 한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우리의 촉각은 감사의 촉각이어야 한다.
추수감사절이다. 지난 한해도 돌아보니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측량 못할 은혜이다.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데 오감으로 다 표현하기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오감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 나의 오감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실히 드러내자.
11.2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