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전주곡은 앞으로 전개될 전곡(全曲)을 예표(豫表)한다. 밝은 전주곡이 밝은 전곡을 이끌고 묵직한 전곡은 그에 걸맞는 전주곡으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하나의 곡(曲)으로 생각한다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인생 전주곡은 어떠할까? 놀랍게도 대단히 역설적(逆說的)이다. 우리가 연초(年初)에 힘 있게 부르는 찬송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그렇다. 어두움이 밝아오고,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는 것이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전주(前奏)와 후주(後奏)이다. 예상을 뛰어넘지 않는가.
육신의 상처는 만지면 아프다. 잘못 다루면 더 덧난다. 그러나 그 상처가 확실히 치유되고 그 상처 위에 더 좋은 피부를 계속 갖게 된다면 잠시의 상처를 마냥 싫어할 이유는 없다. 상처는 육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도 있다. 상한 마음이다. 치유가 쉽지 않다. 평생 그 아픔, 그 쓰라림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쓰러져 흙이 될 수 있다. 얼마나 참담(慘憺)한가.
둘째 아이가 어렸을 때이다. 처갓집 가족들과 단체로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가 그 아이를 잃었다. 떠들썩한 분위기 가운데 길을 걷다가 아이가 아빠엄마는 물론 다른 가족들을 놓치고 다른 길로 간 것이다. 아이를 다시 찾기까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다. 다시 찾은 아이를 향해 엄마가 “그러 길래 내가 뭐랬어. 엄마 손 꼭 잡으라고 했어 안 했어, 너는 놔두고 형만 데리고 올 걸 그랬다” 라고 했거나 그 옆에 있던 내가 “속 썩이는 너는 혼 좀 나야해!” 하며 철썩 등짝을 때렸다면 둘째 아이는 어린 나이에 엄청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그 때 그러지 않았지만 그렇게 대할 수도 있었다. 우리 모두는 부지(不知) 중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오래간다. 치유되지 않으면 영원히 간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그런 마음의 상처를 딛고 행복을 노래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처와 아픔이 행복의 전주곡이다. 상처가 저절로 행복이 되겠는가. 치유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 탁월하신 상처의 치유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는 연약해 보셨다. 그는 상처를 받아 보셨다. 그러시기에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상처받은 자들을 잘 이해하신다. 그리고 잘 도와주시고 잘 고쳐 주신다. 그분이 만져준 상처는 행복의 전주곡이다.
남편은 대덕 연구단지의 실력 있는 연구원으로, 하나 뿐인 아들은 공부 잘하는 중학생으로, 자신은 대학의 존경받는 교수로 재직하면서 밝고 재미있게 지내는 집사님 가정이 있었다. 어느 월요일 아침, 조금 전에 헤어진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悲報)를 그 집사님은 접하게 되었다. 남겨진 두 식구에겐 밝음 대신 어둠이, 재미 대신 슬픔이 깃들었다. 그 가정의 슬픔은 그가 섬기던 교회와 대학 전체의 슬픔이었다. 당시 함께 교회와 대학을 섬기던 내게도 너무 큰 아픔이었다. 상실(喪失)의 상심(喪心)이 더 깊어갈 때 그 집사님이 내게 말했다.
“목사님, 이제 저는 이길 수 있어요. 나의 고통이니까 나의 관점으로만 보았는데 이 고통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셨어요.” 내가? 물론 아니다. 상처받은 치유자 예수님이 설교 중에 그 마음의 상처를 만지신 것이다. 그 집사님은 자기만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관점을 가진 집사요 하나님 마음을 가진 교수로 일어섰다. 그 아들에게는 나도 어렸을 적에 엄마를 잃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더니 그 후 어른 예배에 참석하면서 비슷한 상처가 있었던 설교자의 설교를 귀담아 듣곤 했다. 그 아들은 자기가 공부해야할 뚜렷한 이유를 일찍이 찾았다. 그 슬펐던 상처의 가정은 이전에 생각도 못했던 행복의 이야기를 예수님 안에서 만들어 갔다. 상처는 확실히 행복의 전주곡이다. 예수님이 만져주시기만 하면.
08.0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