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우리나라 양궁이 세계적인 수준이라 양궁경기를 여러 차례 본적이 있다. 선수가 숨을 죽이며 활시위를 젖힐 때 같이 숨을 죽였다가 힁하고 날아간 화살이 과녁에 꽂힐 때 그 결과에 따라 환호도 하고 탄식도 뱉곤 했다. 우리가 잘 맞았다고 소리 지르는 사이 과녁은 얼마나 아파할까? 정조준해서 날아오는 모든 화살을 온 몸으로 맞아야 하는 과녁이 입이 있다면 “그만, 이젠 제발 그만”이라고 외칠 것 같다. 내가 과녁이라면 나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저런 화살들이 날아올 때 그 화살들에 박혀 단말마(斷末魔)와 함께 이리저리 비틀대다 쓰러질 것이다.
어렸을 적에 동네에 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원형 수로관(水路管)이 널브러져 있곤 했다. 그 수로관 속에서 놀기도 했다. 뻥 뚫린 통로는 과녁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이 자기를 향해 밀려오더라도 개의(介意)치 않는 것은 그것이 곧 통과해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과녁의 삶이 보편적인 가운데 통로의 삶은 단연 탁월한 대안(代案)의 삶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도 그것을 끌어안지 않고 다 흘려보내니 더 이상 힘들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안’이라는 말은 얼마나 신선한가. 질식할 것 같은 제도권의 교육을 견디다 못해 대안학교가 여기저기서 유행처럼 일어났다. 대안의 삶을 일찍이 노래한 사람이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마이 웨이(My Way)는 사람들이 기대하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더 이상 가지 않겠다는 선언적 노래이다. 그 가사의 일부는 이렇다.
“친구여, 분명히 말할 게요. 내가 잘 알고 있는 내 얘기를 할게요. 난 충만한 인생을 살았답니다. 모든 길을 다 가봤고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방식대로 했다는 거예요. 후회요? 조금 있었죠, 하지만 입 밖에 내서 말할 정도는 아니죠.” 청소년 때나 청년 때 이 노래를 듣고 일탈(逸脫)을 꿈꾸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즈음도 대안의 삶을 꿈꾸는 청년들이 그 줄을 잇고 있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가진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책도 그런 삶을 부추기고 있다. 왜 굳이 노력하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삶을 사느냐는 것이다. 대안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다. 사람들이 성적(性的) 지향의 대안을 찾아 살아온 지가 벌써 오래고 계속 사회적 진통과 종교적 논쟁을 생산하고 있다.
대안의 삶은 타당한가? 불가(不可)한 대안이 있고, 가능(可能)한 대안이 있다. 상대적으로 분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규범은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말씀하신 인간의 존재와 사명에는 대안이 없다. 하나님보다 높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해도 좋다. 성경보다 지혜로운 자가 있으면 성경을 집어 던지고 맘대로 살 수 있겠다. 경험주의와 이성주의의 허구성을 역사에서 보고도 왜 또 다시 성경을 경험과 생각의 잣대로 해체하려 하는가?
어느 교회나 어느 교단이나 성경 위에 있을 수 없다. 대안의 삶을 꿈꾸며 성경을 수정하려는 회의가 어찌 교단회의의 의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성경을 떠난 대안의 삶을 시도하지 말자. 논의도 하지 말자. 그 누구도 그럴 자격이 없고, 어떤 교단도 그럴 권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