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지난 주 역사상 가장 지루했던 슈퍼볼로 평가받는 경기가 있었다. 시즌 중(中)에 매우 공격적인 팀들이었기에 그 내용이 기대되었지만 3쿼터까지 양(兩)팀 모두 터치다운 하나 없었고, 결국 13-3이라는 초라한 점수가 그 결과였다. 승리(勝利)한 뉴잉글랜드는 여러모로 미흡(未洽) 했고, 패(敗)한 LA 램스는 내내 답답했다. 이런 운동 경기를 보고 혀만 찰 일이 아니다. 성도는 성화되어야 하고 교회는 성숙되어야 하는데 정작 성화의 답보와 성숙의 미흡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일까?
복음은 케리그마(κήρυγμ/선포)와 디다케(διδαχή/가르침)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탁월(卓越)한 방식인 케리그마와 디다케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하지만 복음이 선포와 가르침에만 머물러 있다면 성도와 교회는 답보와 미흡의 아쉬움을 반복할 것이다. 복음은 마침내 수노디아(συνοδια/동행) 되어야 한다. 수노디아라는 단어는 누가복음 2장 마지막 부분 예수님과 그 부모의 이야기 가운데 나온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συνοδια)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43-44절). 예수님과의 동행이 곧 복음과의 동행이다. 복음을 잃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잃었다는 말이다.
동행이 없는 복음은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성화의 답보와 성숙의 미흡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모습은 기독교 스스로를 참담(慘憺)케 한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에 적대적(敵對的)인 사람들에게 복음은 현실과 괴리(乖離)된 비역사적(비(非歷史的) 사변(思辨)이라는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동행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시가 있지 않은가. “임신한지 8개월은 되어 보이는 한 여자가 뒤뚱거리며 길을 건너다 말하네. 아가야 둘이 한 길 가기는 힘든 일이란다....”(박의상).
동행은 즐겁다. 이런 시가 그것을 일러준다.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이 하나가 강아지를 풀어놓고 간다. 강아지가 앞질러 저만치 가다가 아이를 돌아본다. 그리곤 안심이 되는지 다시 저만치 내달린다. 서로 은연중에 여물어버린 눈짓. 아이가 가는 길이 강아지 길과 겹쳤다. 강아지와 아이가 가는 길을 낮달이 굴렁쇠를 굴리며 따라붙는다. 길이 강변을 계속 이어가니 물이 동행하며 춤춘다....”(정일남).
쉽지 않음과 즐거움이 교차(交叉)하는 동행. 어떻든 복음과의 동행이 없는 한, 성화의 답보와 성숙의 미흡은 점점 더 심화(深化)될 것이다. 복음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하지만 주관적으로도 반드시 경험되어야 하기에 복음과의 동행은 미룰 수가 없다. 복음과의 긴밀(緊密)한 동행으로 스스로의 예측(豫測)과 세상의 기대를 뛰어 넘어 성화의 진보와 성숙의 풍성을 함께 이루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