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숙을 넘어 익숙으로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이제는 장가간 두 아들이 있다. 이들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미국에서 자라났다. 아무래도 미국적 방식과 문화에 더 친숙(親熟)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따로 있다. 피자가 아니다. 스테이크도 아니다. 김치찌개이다. 왜 그럴까? 어렸을 적부터 집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에 더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친숙한 문화 속에도 익숙한 습관은 그 진가(眞價)를 발휘(發揮)한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여기(here) 그리고 지금(now)"에서 살아가는 친숙한 환경은 여전히 이성(理性)과 합리성(合理性)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거기에 감성(感性)과 소비(消費)와 인공지능(人工知能)이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는 환경이다. 

도대체 우리의 다음세대를 잠식(蠶食)해가는 친숙한 현대 문화의 토대(土臺)는 무엇일까? 찰스 다윈을 결코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세상에서 자애로운 창조주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진화론은 더 이상 과학적 이론에 머물러 있지 않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의 종교적 위치에 있다. 

사르트르는 어떤가? 그는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앞선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이 땅에 목적(본질)없이 우연히 던져진 존재(실존)라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배제한 여러 근대의 과학적, 사상적 토대위에 현대의 신앙 같은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왜 다윈이나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뿐이겠는가? 유신론을 버리고 유물론으로 치닫게 한 산업혁명도 쇼핑에 친숙한 현대문화의 토대이다. 기독교가 서둘러 다음 세대를 영원한 것에 익숙한 세대로 세우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친숙한 현대문화에 휘둘려 사는 다음 세대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一助)할 것이다. 

영원한 것에 익숙한 세대의 실제는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 뜨겁게 예배드리는 삶에 익숙한 세대로 세우는 것이다. 예배의 감격과 기쁨이 저들의 삶에 익숙해져서 그 어떤 친숙한 세상 문화 속에서도 예배를 그리워하게 해야 한다.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도 어머니가 정성으로 계속 만들어 준 김치찌개를 좋아하듯,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배를 기쁘게 드리는 세대로 세워야 한다. 

Calvin 칼리지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제임스 스미스는 그의 책 “Imaging the Kingdom(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에서 ‘지성의 성화’에 치중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습관의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說破)하였다. 예배드림이 다음세대에게 계속 강조되고 또 실제적으로 반복 훈련되어 마침내 익숙한 습관이 된다면 친숙한 세상 문화의 어떤 상황에도 우리 자녀들을 내놓기가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친숙한 문화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뜨겁게 드리는 익숙한 예배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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