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교가 아닌 주님의 선교해야

김호동 목사(불가리아 선교사)

“선교는 방향성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선교지에 뛰어듭니다. 그러나 현지인 선교가 아닌 교회를 세워놓고 그 지역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합니다. 이는 선교의 방향성이 결여된 현상이라 보여집니다.”

지난 13일 코너스톤교회에서 열린 커넥션2011 행사를 위해 LA를 방문한 김호동 선교사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불가리아개혁장로교신학교 학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그는 ‘선교는 전체적인 선교의 방향성을 가지고 큰 그림을 그리며 나아가 파송된 지역이 복음화 되는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1988년 철마중앙교회를 개척하고 1992년까지 개척목회를 하다가 92년 7월 GMS 선교사로 불가리아로 파송이 되었지요. 당시 소피아한인장로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민목회를 하다가 느낀 것은 선교사가 목회하는 것은 자신의 사역을 충분히 펼치는데 제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민목회와 더불어 94년에 개교한 불가리아개혁장로교신학교에서 현지인 목회자를 양성하면서 느낀 것은 ‘이민목회는 매우 제한적인 선교’라는 것이다. 즉 선교는 결국 현지인들에 의해 사역이 진행돼야 하며 선교사는 ‘현지인들을 양성하고 세워 그들로 하여금 사역을 펼쳐나가 민족복음화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인데 목회로서는 그것을 이루어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 그래서 2005년 4월 한인교회 사역을 내려놓고 현재까지 신학교 사역과 총회세계선교회, 세계선교사협의회, 그리고 유럽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사역으로 동유럽선교를 펼쳐나가고 있다.

그가 불가리아에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는 많은 여정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신대원을 다니면서 교회가 없는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개척사역을 5년간 하면서 어떻게 사역을 펼쳐 나갈지 기도를 하던 중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았다.

“선교를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선교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었어요. 단지 친구가 일본선교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에 일본선교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으니까요.”

일본선교를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던 그가 선교지를 동유럽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은 우연히 알게 된 선교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어서였다. 당시 강사로부터 동유럽선교를 강조하는 말을 들었던 그는 강사의 말을 의미 있게 듣지 않았다. 그러나 1년 후 비슷한 성격의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고 1년 전 세미나에서 만났던 강사로부터 똑같은 말 즉 동유럽선교에 대한 말을 듣게 되면서 그의 선교의 방향은 일본이 아닌 동유럽으로 수정됐다.

“처음 동유럽 선교에 대해서는 ‘누군가 그곳에 갈 사람이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왜냐면 저는 일본선교를 해야 했었으니까요. 그러나 1년 후 공교롭게 같은 분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지난 1년간 동유럽지역에 선교를 떠난 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아 하나님께서 저분을 통해 동유럽선교를 떠나라고 하시는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동유럽선교에 헌신했고 불가리아로 떠나게 되었어요.”

불가리아 하면 장수의 나라 외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김호동 선교사의 이름역시 연예인 강호동 씨를 연상케 한다면서 한국과 미국에 선교보고를 할 때면 기도를 인도하시는 분이 ‘불가리아와 김호동 선교사를’이라고 해야 하는데 ‘볼리비아와 강호동 선교사를’라고 기도해 당혹스러웠던 적도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불가리아는 왠지 생소하게 다가옵니다. 불가리아는 냉전시대 소련의 영향권 안에 있던 국가이며 공산권 국가이지요. 과거 터키의 지배를 받았었지만 러시아에 의해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처럼 매우 밀접하다고 볼 수 있지요. 경제적으로는 유럽연합(EU)의 27개 회원국 중 알바니아와 함께 가장 못사는 나라입니다. 1980년대 개혁 개방의 물결이 불가리아에 덮쳤으며 1989년 지프코프의 퇴임 후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공산주의 붕괴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공산주의 붕괴와 개방은 불가리아 민족에게 공허한 감정으로 자리잡게 됐지요”

불가리아의 종교현황으로는 개신교회가 2% 이슬람이 13% 불가리아 정교회가 85%이다. 과거 공산주의 치하에서 개신교회의 핍박은 상당했다. 공산치하에도 오순절, 회중교, 침례교, 감리교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흔적만 있었고 활동을 못하고 있었다. 김 선교사 역시 초기 불가리아 선교를 할 때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핍박을 받았다고 밝혔다.

“공산치하의 불가리아에서 개신교 선교사의 활동은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저희 부부의 사역을 틈만 나면 방해하는 것이었어요. 협박을 하기도 했었고 때로는 테러를 가하기도 했었어요. 하루는 제가 외출 중에 있는데 집에 들어가 보니 제 집사람이 테러리스트들이 휘두른 총개머리 판에 머리를 심하게 맞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어떤 때는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었으니까요.”

이러한 물리적 핍박은 해마다 한번이상 발생한다고 말했다.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러한 핍박으로 인해 선교지에서 사역을 더 이상 하지 못하고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 어떠한 핍박에도 김 선교사 부부는 꿋꿋이 견디며 사역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지금은 그 힘든 여정이 자양분이 되었던지 이웃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그가 20년간 열정과 순종으로 선교사역을 하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의 사역은 열정보다 순종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그리고 어느 순간 지나간 길을 뒤돌아봤을 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매우 정확하며 이는 어떠한 선교이론보다도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며 선교사의 선교, 내 선교가 아닌 주님의 선교를 해야 한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를 항상 생각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김호동 선교사는 부산 장로회신학교와 총신대학원 졸업하고 소피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 후 2006년 Christian Bible College & Seminary에서 선교학 박사학위 취득했다. 91년 남부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92년 7월 총회세계선교회 선교사 불가리아에 파송된 후 현재까지 불가리아의 영혼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가족으로는 부인 배점선 선교사와 아들 김주신이 있다.

연락처: khodongbg@daum.net <박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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