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김윤정 (1865-?)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윤정은 1865년경에 한국에서 김해 김씨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년배인 김윤국과 결혼한 그는 세 자녀를 두었다. 그즈음 그는 월출동(Woal Chool Dong)에서 거주했다. 월출동이라면 오늘날 광주 광역시 북구 월출동인 것 같다. 하와이 꿈을 꾼 김윤정은 해외로 이주하기에는 비교적 나이가 많은 40세인 1905년 4월 27일에 가족과 함께 일본 고베에서 하와이행 선박 시베리아에 승선했다. 그들은 1905년 5월 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안착했다. 

하와이로 향하면서 김윤정은 영문으로 Kim Youn Chong이라고 표기했으나 Kim Yoon Chong 또는 Kim Yoon C.로도 사용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1905년 5월에 김윤정과 그의 가정은 하와이 오아후섬 와히아와 농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하와이에 이주한 지 2년이 되던 1907년 2월 2일부터 3월 3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던 백인 교회인 제일감리교회에서 감독 얼 크랜스톤 목사의 사회로 미국 북감리교 제2회 하와이 연회가 개최되었다. 크랜스톤 감독은 오아후섬에 있던 와히아와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 노동자를 위하여 임정수를 지방 전도사로 파송하였고, 김윤정을 권사로 파송하였다. 임정수는 그곳에 있던 배영의숙에 출석하던 45명의 한인을 중심으로 그해 9월에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개척했다. 그해 본 교회에 회계로 김국경이 섬겼고, 양홍화가 속회를 인도했다. 이듬해 1908년 제3회 하와이 연회에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의 통계가 수록되지 않아 교회 교세를 가름할 수가 없다.

그런데 1907년에 김윤정과 그의 가정이 같은 오아후섬의 에와에 있던 에와 농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08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미국 북감리교 제3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하와이 호놀룰루 제일장로교회에서 데이비드 H. 무어 감독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존 W. 와드만 목사였고, 한국어권 교회를 총괄한 한인 총무는 홍치범 목사였다. 제3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하와이 오아후섬 에와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 가정으로 구성된 한인감리교회에 김유순, 김윤정 그리고 이선일, 세 명의 한인 사역자를 파송하였다. 김유순은 작년에 이어 에와 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로 파송되었고, 김윤정은 이선일과 함께 에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받았다. 

김윤정이 에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부임할 1908년 1월 당시 에와 한인감리교회 교세는 학습 교인이 54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27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4명이었으며, 세례를 받은 자가 2명이었다. 그리고 본 교회에 주일 학교가 있었고, 주일 학교 직원과 교사가 10명이었으며, 이 중 6명의 교사가 본 교회 세례 교인이거나 학습 교인이었고, 주일 학교에 등록한 학생이 119명이었고, 이 중 81명의 학생이 본 교회 교인이었고, 매주 평균적으로 출석한 학생이 85명이었다.

1908년이나 늦어도 1909년 2월 이전에 김윤정과 그의 가정이 오아후섬의 와히아와로 다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1909년 3월 3일부터 7일까지 존 T. 존즈 목사가 시무하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백인교회인 제일감리교회에서 미국 북감리교 제4회 하와이 연회가 감독 찰스 W. 스미스 목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그해 감리사는 작년에 이어 존 W. 와드만 목사였고, 한인 총무도 홍치범이었다. 본 연회는 와히아와 지방 한인을 위하여 김유순과 김윤정을 파송했다. 김유순은 와히아와 지방뿐만 아니라 와이파후 지방과 아리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순회 전도사였다. 그리고 김윤정은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었다. 그해 와히아와 한인 감리교회에서 수고한 다른 사역자가 여러 명이 있었다. 김영기와 이준익은 회계였고, 송치순과 이정근은 속회를 인도하였으며, 박정수는 주일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김윤정을 파송한 1909년 3월에 개최한 제4회 하와이 연회록에는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가 소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듬해 김유순이 순회 목사로 파송 받았는데 와히아와를 포함하여 와이파후와 아리를 담당하였으므로 와이파후 한인감리교회 통계에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와 아리 한인감리교회 통계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와이파후 순회 구역 통계에 따르면 1909년 3월에 학습 교인이 19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9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8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은 없었다. 주일 학교가 두 곳에 있었고, 주일 학교 교사와 직원이 6명이었는데 이중 교회 등록된 자는 4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29명이었는데 이 중 10명이 교회 교인이었고, 평균 25명이 출석하였으며, 이 중 10명이 신앙고백을 하고 믿는 자가 되었다. 그리고 600달러에 해당한 예배당이 한 곳에 있었다. 지난 한 해 지출 결산이 60달러였는데 이중 선교 항목에서 해외 선교 하에서 교회를 위하여 1달러, 내지 선교/교회 확장 하의 교회를 위하여 5달러, 주일 학교에 2달러를 지급하였고, 교육 항목에서 교회 일반 교육과 어린이 기금으로 각각 1달러를 지출하였고, 주일학교 항목에서 주일학교를 위하여 1달러를 지불하였다. 흑인보조회와 미국성서공회에 각각 1달러를 후원하였고, 부인 내지선교회에 2달러를 보냈다. 기타 지출이 45달러였다.

1910년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미국 북감리교 제5회 하와이 연회가 개최되었다. 본 연회를 사회한 감독은 에드윈 H. 휴즈 목사였고, 그해 감리사는 작년에 이어 와드만 목사였다. 제5회 하와이 연회에서 휴즈 감독은 김윤정과 김유순을  와이파후 순회구역에 파송했다. 김윤정을 작년에 이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로 파송했고, 김유순 목사를 와히아와를 포함하여 와이파후와 아리를 순회하면서 전도하는 순회 목사로 파송했다. 그러므로 김유순 목사가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못할 때 김윤정 권사가 예배와 목회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해 주일학교 교사는 조윤여였다.

1910년 3월 제5회 하와이 연회록에 따르면 와이파후 순회 구역의 교세는 지난 해와 비교할 때 교인수는 증가했으나 헌금액은 감소했다. 학습 교인이 17명이 많은 36명, 세례 교인이 12명이 많은 21명이었고, 지난 한 해 동안 5명이 적은 3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유아세례 교인은 작년에 없었으나 4명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 주일 학교는 지난 해와 같이 두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1명이 적은 5명이었는데 이중 교회 등록된 자는 1명이 많은 5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25명이 많은 54명이었는데 이 중 35명이 많은 45명이 교회 교인이었고, 평균 13명이 많은 38명이 출석하였으며, 이 중 5명이 많은 15명이 신앙고백을 하고 믿는 자가 되었다. 작년에 없던 엡워스 청년회가 한 지역에 조직되어 회원이 15명이었다. 그리고 작년과 같이 600달러에 해당한 예배당이 한 곳에 있었다. 지난 한 해 지출 결산이 44달러가 적은 16달러였다. 이중 선교 항목에서 해외 선교 하에서 교회를 위하여 작년과 같은 1달러를 지출하였고, 내지 선교/교회 확장 하의 교회를 위하여 7달러가 많은 12달러를 지출하였으며, 교육 항목에서 교회 일반 교육에만 1달러를 지출하였고, 주일학교 항목에서 주일학교를 위하여 1달러가 많은 2달러를 지출하였다. 흑인보조회와 미국성서공회 그리고 부인 내지선교회에는 후원하지 않았다. 

1911년 1월에 개최한 제6회 하와이 연회에서 휴즈 감독은 김윤정을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됐다. 김윤정 외에도 양흥엽을 파송하였으나, 그 후 양흥엽 대신에 유문찬이 권서로 섬겼다. 그해 연회록에는 파송 목사가 지정되어 있지 않았으나 김이제 목사가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에서 사역하였고, 김병애가 속회를 인도하였고, 정윤서가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다.

그해 하와이 연회록에 나온 와이파후 순회 구역의 교세를 작년 통계와 비교할 때 교인 훈련에 치중했고, 주일학교가 성장했다. 학습 교인이 11명이 적은 25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9명이 많은 30명이었고, 지난 한 해 동안 9명이 많은 12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작년과 같은 4명에게 유아세례를 주었다. 주일학교는 한 곳이 많은 3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1명이 많은 6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2명이 많은 56명이었다. 작년과 달리 교회 등록된 교사나 학생, 평균 출석한 학생수와 믿기로 신앙 고백한 학생수는 게재하지 않았다. 엡워스 청년회가 한 곳이 많은 두 곳에 조직되어 회원이 13명이 많은 28명이었다. 작년과 같이 600달러에 해당한 예배당이 한 곳에 있었고, 작년에 없는 수리비로 24달러를 지출하였다. 지난 한 해 지출 결산이 12달러가 많은 28달러였다. 이중 선교 항목에서 해외 선교 하에서 교회를 위하여 지출하지 않았고, 내지 선교/교회 확장 하의 교회를 위하여 13달러가 많은 25달러를 지출하였고, 교육 항목 대신에 선교부 항목으로 변경된 가운데 교회 일반 교육에만 작년과 같이 1달러를 지출하였고, 주일학교 항목에서 주일학교를 위하여 1달러가 적은 1달러를 지출하였다. 작년과 같이 흑인보조회와 부인 내지선교회에 후원하지 않았지만, 미국 성서공회에는 작년에 하지 않았는데 1달러를 후원했다.  

1912년에도 제7회 하와이 연회에서 제임스 W. 배쉬포드 감독이 김윤정을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됐다. 그해 하와이 연회록에는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박종수 지방 전도사를 파송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는 유문찬 지방 전도사가 본 교회 목사로 사역하였다. 지난 해와는 달리 그해에는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가 순회지역에 포함되지 않았고 단독 교회로 지정되었다. 그해 김해석이 회계로 일했고, 주일 학교 교사는 김홍순이었다.

지난 여러 해와는 달리 그해 하와이 연회록에서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교세를 읽을 수 있다. 학습 교인이 14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18명이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한 명도 유아세례나 세례를 받은 자는 없었다. 주일학교 직원과 교사가 2명이었고, 유아까지 합쳐서 29명이었다. 엡워스 청년회 고등부가 조직되었고, 15명이 등록하였다. 1,000달러에 해당하는 예배당이 있었고, 300달러 시세의 사택도 있었다. 지난 한 해 지출 결산이 4달러였고, 이중 선교 항목에서 해외 선교 하에서 교회를 위하여 지출하지 않았고, 내지 선교/교회 확장 하의 교회를 위하여 1달러를 지출하였고, 선교부 항목 아래 교회 일반 교육에 1달러를 지출하였고, 주일 학교에 지출하지 않았고, 흑인 보조회와 부인 내지 선교회 그리고 미국 성서공회에도 후원하지 않았다.    

1913년 연회록에 따르면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로 김이제 목사와 김윤정 권사가 파송되었다. 그런데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 역사에는 김이제 목사 대신에 유문창 지방 전도사가 본 교회를 섬겼고, 김윤정의 이름은 찾을 수 없고, 기타 사역자를 소개하지 않았다.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는 오늘날 올리브 연합감리교회로 변신했다.

1913년 하와이 연회록에 김윤정의 이름이 나온 후 하와이 연회록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김윤정의 딸 김노디를 통해 알게 된다. 김노디는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김도라 또는 손노디로 잘 알려졌다. 김노디는 우스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에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오벌린 대학을 졸업했다.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지 2년에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교장이 되었고, 세계 제2차 대전 후 이승만 박사는 김노디를 한국 조달청장에 임명했다. 

damien.sohn@gmail.com

 

12.2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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