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황인환은 1878년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결혼한 그는 이무골에서 거주했다. 경기도 여주 오학동에 이무골이 있고, 경북 안동 풍천면에 이무골이 있고, 경북 청송 진보면에 이무골이 있고, 경남 함안 법수면에 이무골이 있다. 이들 중에 거주했을 것이다.
26세가 되던 1904년에 황인환은 아내를 한국에 두고 홀로 하와이 노동 이민선 몽골리아 선편에 올랐다. 그는 그해 7월 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내렸다. 그의 이름은 영문으로 Whang In Whan 또는 Whang In W로 표기됐다.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
초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 명부에 황인환의 이름을 찾을 수 없어 그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닌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하와이섬에는 다섯 지역에 한인 감리교회가 있었다. 고할라 지역, 힐로와 하갈나우 지역, 호녹가와 국구해리 지역, 파할나 지역, 코나와 노스 앤드 사우드 지역 그리고 파팔노아 지역이었다. 본 선교연회는 황인환을 하와이섬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일반적으로 2, 3년간 권사로 파송하였다가 일정 기준에 충분하면 전도사로 파송하였으므로 적어도 1914년과 1915년에 황인환이 권사로 파송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역은 1914년부터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그달에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와 국구해리 한인 감리교회를 순회하는 목사로 박세환을 작년에 이어 파송하였고, 이완구, 변성운 그리고 고덕화를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황인환이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 받을 당시 본 교회 통계는 따로 있지 않았고 국구해리 한인 감리교회와 합산되었는데 아래와 같았다. 주일 학교가 네 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21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62명이 등록하였다. 학습 교인이 11명, 세례 교인이 45명, 유아세례 교인이 28명이었다. 엡워스 청년회에 30명이 등록하였다.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는 650달러 시가의 예배당을 소유했고, 예배당을 위하여 지불하고 수리한 비용이 235달러였고, 연료와 전기 등에 45달러를 지불했다.
1917년 하와이 선교 연회록을 구할 수 없어서 단정할 수는 없어도 1916년과 1918년 그리고 1919년에도 황인환이 전도사로 파송된 정황으로 볼 때 1917년에 모인 제12회 하와이 선교연회도 황인환을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에 파송한 것으로 보인다.
1918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회 하와이 연회가 소집되었다. 그해 하와이 연회는 황인환을 재작년에 이어 이난C와 함께 하와이섬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전도사를 한 사람 더 파송한 것으로 보아 본 교회가 성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재작년과 다르게 순회 목사가 아닌 담임 목사로 박세환을 파송하였음에서나 재작년보다 2명이 많은 5명의 권사를 파송하였음에서도 교회가 성장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재작년에 파송된 세 사람이 아닌 정한흥, 변성환, 박조범, 이성옥 그리고 최성약을 권사로 파송하였다.
1918년 3월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의 통계를 국구해리 한인 감리교회와 합산된 재작년 통계와 비교하면 교회의 형편을 알게 된다. 주일학교가 두 곳이 적은 두 곳이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10명이 적은 11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32명이 적은 30명이 등록하였다. 그러나 그 수치가 절반에 가까우므로 성장하지 않았고 현상 유지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학습 교인은 두 교회가 합친 수보다 29명이 많은 40명이었고, 세례 교인이 10여 명이 적은 30여 명이었고, 유아세례 교인이 18명이 적은 10명이었다. 엡워스 청년회에 10명이 적은 30명이 등록하였다. 재작년과 같이 650달러의 시가를 가진 예배당을 소유했는데 예배당을 위하여 지불하고 수리한 비용이 110달러가 적은 125달러였다. 새 항목으로 훈련비로 40달러를 지불했고, 기타 목적 헌금이 578달러였다. 위에서 비교한 수치를 볼 때 대체로 현상 유지였으나 학습 교인과 헌금이 많았다. 그러므로 재작년과는 다르게 많은 사역자를 파송한 이유가 신참 교인이 많았고, 헌금 생활에 열심 있는 교인이 많았을 뿐 아니라 호녹가 지역 농장에 한인 노동자가 많이 유입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1919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모였다. 하와이 선교연회 감리사 윌리엄 H. 프라이 목사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한인 감리교회에 두 가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하와이 선교연회가 이름있는 부흥사였던 김US 목사를 한국에서부터 초청하여 각 한인 감리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여 한인 이민교회의 정치적 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초청 강사 자신이 실패하였다는 보고서를 냈고, 다른 안타까운 사건은 하나 한인감리교회를 시무하던 최S은이 병환 요양차 한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소천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 목회는 긍정적이었다. 1919년 하와이 선교연회는 호녹가 한인감리교회에 박기홍 목사를 파송하면서, 작년에 이어서 황인환 전도사를 본 교회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황인환 전도사뿐만 아니라 작년보다 한 명 많은 2명의 전도사 곧 김정구와 이만춘을 파송하였다. 이로써 작년보다 교회가 더 성장할 것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보고에 따르면 한 해 동안 10명이 세례를 받았고, 5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2명이 학습을 받았다. 그리고 주일학교가 세 곳에 있었고, 교사와 직원은 3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38명이었다.
그해 8월에 신한민보는 ‘동족을 사랑하면 우리 적십자회에 응모하시오‘ 라는 제하의 광고를 냈고, 부제는 ’적십자회를 도우시오' 였다. 이 제하에서 “본사에서 00에 있는 대한민국 적십자회 본부의 명령을 좇아 이제 적십자회원과 회금을 모집하오니 우리 독립과 자선 사업을 찬조하시는 동포들은 기회를 잃지 말고 곧 응모하시오. 회금은 1달러 이상으로 내지 100달러까지 수의로 낼 수 있나이다... 적십자회 지부 신한민보사.”라고 썼다. 많이는 5원을 냈고 적게는 1원을 냈는데 황인환은 1원을 냈다.
이듬해 5월에 호놀룰루에 거류하던 남녀 동포들 수십 명이 하와이 한인 적십자회 지부를 조직하였다. 우선 사무에 착수하여 임시 임원을 조직하였는데 황사용 목사와 함께 황인환이 자치 규정을 기초하기로 하였다.
1920년 이후 하와이 선교연회가 전도사와 권사 파송 명단을 선교연회록에 게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1925년 5월에 발간된 한인교회보에 ‘근친차로 귀국’이라는 기사에서 황인환을 찾을 수 있다. “하와이섬 호녹가 교회 전도사 황인환 씨는 몇 달 전에 자모상의 부음을 받고 날날 망극지타를 이기지 못하여 동동북식이더니 생존하신 춘부장이 나가보옵는 것이 자식의 도리될까 하여 금월초 4일 천양환 선편으로 출범하였는데 황인환 씨의 부인과 처제인 김공도 여사도 출항하여 부두에서 여러 형제자매들과 한가지로 석별하는 정은 바닷물과 같이 넓고 깁더라. 그런데 황인환 씨의 돌아올 기한은 3, 4삭이라하니 무사히 회환하기를 바란다더라.” 이 기사에서 그해 5월에 모친상의 부음을 받아 3, 4개월 한국에 머물 예정이었던 황인환을 1925년 4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20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한명교를 호녹가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파송하면서 전도사로 파송하였음을 알게 된다.
황인환이 파송되던 1925년 4월에 보고된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의 통계는 아래와 같았다. 유아세례 교인이 3명, 학습 교인이 16명, 세례 교인이 14명이었고,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10명이었는데 평균 출석도 10명이었으며, 예배당 가격은 1,000달러로 상승한 반면에 지난 한 해 지출 경비는 3달러였고, 세계 봉사기금으로 10달러를 헌금했다. 이상에서 본 바로 1918년과 비교할 때 교회가 상당히 축소되었다.
황인환 전도사가 1년간 사역한 결과를 1926년 4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볼 수 있다. 황인환이 파송되던 1925년 4월에 보고된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의 통계는 아래와 같았다. 유아세례 교인이 1명이 준 2명, 학습 교인이 2명이 준 14명, 세례 교인이 5명이 준 9명이었고, 주일학교 보고와 건물 보고와 지출 보고는 없었고, 세계 봉사기금으로 5달러가 준 5달러를 헌금했다. 이로써 교회가 현상 유지를 하기도 어려운 형편임을 알게 된다.
1918년 11월에 박용만이 호놀룰루에서 창간한 태평양시사가 오랫동안 정간되다가 다시 개간되어 제301호가 발행되었는데 발행자인 대조선 독립단에서 1926년 2월에 호항 총단 내에 대표 회의를 열고 의장 홍한식 목사 사회하에 총단 임원 선거가 있었다. 총단장으로 김윤배가 다시 되고, 황인환이 부단장 겸 주필로 피선되었고, 총단 임원으로 총무에 김홍범, 서기에 김이제, 재무에 차병수, 군무에 김상원, 법무에 이상호, 학무에 홍한식, 구제에 신국겸, 교제에 이원순, 노동에 이복희로 조직하였다. 그해 통상 수입은 대략 3,000달러였고, 지출은 대략 2,800달러였으며, 작년에 빚지고 갚지 못한 비용이 476달러, 잔고가 1,080달러 73센트였다. 그런데 그해 3월에 종간되었다.
1935년 1월에 제27회 통상대의원회의를 총회장 김윤이 개회하고 9개 지방 대의원을 소개하였다. 황인환은 학갈라우 대의원이었다. 이날 의장 이호직의 사회로 의회를 조직하였는데 황인환은 장두찬과 더불어 건의서 조사위원에 선정되었고, 찬의에 조병요, 기사에 지인영, 통신 서기에 승용환, 사교위원에 김한경, 재정 조사위원에 승동환과 박승준, 비조물 조사위원에 전익주이었다.
와이파후 농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동 지방 국민회 서기로 시무하던 박상근이 1935년 9월 26일 밤 9시에 자택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이 세상을 영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국민총회의 서두원과 함께 황인환이 와이파후 농장으로 출장을 갔다. 황인환 일행은 동 지방 국민회 대의원 이봉수와 일반 회원과 함께 다음날 동 지방 공동묘지에 박상근을 안장하였다. 박상근은 6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서에 ‘11세 때 양친을 떠나 실사회에 나섰었다... 남은 바는 늙고 병 들은 것뿐 약을 끊고자 하나 신체가 쇠약하고 이제는 약을 살 돈도 없어서라’하였다.
다음 달에 호놀룰루에서 국민회와 동지회의 합동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합동 중개인은 김성옥, 최선주, 조병요, 안창호였고, 국민회 대표는 황인환을 위시하여 승용환, 박승준, 박상하였으며, 동지회 대표는 이원순, 조석진, 김이제였다. 이날 중개인의 제안으로 합동에 대한 두 기관의 조건을 듣고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1936년 1월에 하와이 국민총회 대의원회가 있었다. 이날 신임 총회장 조병요가 임원회를 조직하였다. 황인환은 서기로 선정되었다. 이날 몇 가지를 가결하였다. 총회 구제청장을 위하여 기본금을 모집하기로 하였고, 특연으로 교과서를 출판하기로 하였으며, 매삭 수봉되는 대로 임시정부로 납상하기로 하였고, 임원회에 위임하여 경제기관을 설치하기로 하였으며, 기본금 다액을 필납한 회원 11인으로 총회 소유 보관위원을 선정하기로 하였다.
이듬해 1월 하와이 국민총회 총회장 조병요가 임원회를 조직하였다. 작년에 이어 황인환은 임원이 되었는데 그해는 재무였다. 이날 10세 이상 15세 이하의 청년을 국민회 예비회원으로 받고, 부인 구제회 중앙부 2인이 국민회 대의원으로 출석하기로 하였다.
황인환은 호녹가 한인 감리교회 권사와 전도사로 복음 사역을 하면서 적십자회와 태평양시사 그리고 국민총회를 통하여 조국 통일과 민족 사랑을 꾀했다. 그의 마지막은 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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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