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황선경 (187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황선경(黃善慶)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결혼하였으나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아비가 되었는데 읍내(Eup Nai)에 거주하고 있었다. 29세가 되던 1904년에 그는 하와이 노동 이민의 꿈을 갖고 제물포를 거쳐 일본 고베에서 그해 9월 23일에 차이나 선박에 승선하여 다음 달 10월 6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선박 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황경선(Whang Kyeng Sun)으로 잘못 적혀 있다. 그런데 그날 같은 선박에 승선한 황삼봉이 26세의 홀아비로 ‘읍내’에 거주하였었는데 황선경의 가까운 일가로 보인다.

황선경이 하와이에서 영문으로 Whang Sun Kyeng 또는 Whang Sung Kyeng으로 표기되었으나 Whang Sung Kyeng은 Whang Sun Kyeng의 오기로 보인다.

초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명부에서 황선경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한국에서 기독교인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곧바로 황선경은 하와이섬 국구해리로 이동하였다. 그는 대한인 합성협회 하와이 국구해리 지방회에 가입하였다. 대한인 합성협회는 1907년 9월에 하와이에 있던 한인 단체들이 통합하여 결성된 기관이었다. 그러므로 대한인 합성협회는 하와이에 재류하는 동포가 단결을 이루고 정치적 운동을 전개한 첫 출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인 합성협회는 회장제로서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고, 하와이에 재류하는 한인 동포의 안녕을 보장하며, 교육을 장려하는 데 목적을 두었고,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대한인 합성협회는 호놀룰루에 중앙회관을 설치하였고, 그해 10월부터 한인합성신보를 발행하였다. 그때 국구해리 등 47 지방에 지회가 설립되어 총회원은 1,051명에 이르렀다. 초대 총회장은 임정수였고 초대 부회장은 안원규였으며, 2대 총회장은 정원명이었고, 부회장은 이내수였다. 회원은 매년 2달러 25센트를 회비로 냈는데, 그 회비를 ‘으레 바치는 돈’이라는 뜻의 예납금이라고 했다. 황선경도 이 예납금을 냈을 것이다.

1908년 8월에 황선경은 노필규, 이창근, 김익선, 김일만, 김영봉, 김춘명, 차건혁, 주경봉 그리고 정만보와 함께 대한인 합성협회 재무였던 김영일에게 장인환과 전명운을 위하여 의연금을 보냈다. 각자가 많이는 2달러, 적게는 50센트를 보냈는데 황선경이 얼마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이었던 덜함 화이트 스티븐스가 친일 행각을 벌이다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자 장인환과 전명운이 1908년 3월에 페리 부두에서 그를 처단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재판비용으로 의연금을 보냈다.

황선경이 거주하던 하와이섬 국구해리에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기는 1910년 하와이 선교연회에서다. 그해 하와이 선교연회는 국구해리뿐만 아니라 호녹가이지와 파팔노아를 순회하는 순회 목사로 최진태를 파송하였고, 권사로 윤만C를 파송하였다. 황선경이 1910년에도 국구해리에 있었다면 최진태 순회 목사와 윤만C 권사의 인도로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을 했을 것이다. 

황선경이 출석했을 법한 국구해리 한인 감리교회의 1911년 1월의 교세를 순회 목사였던 최진태가 보고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습 교인이 27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7명이었다. 교회 학교에서 활동한 교사와 직원은 7명이었고, 등록한 학생은 27명이었다. 그리고 웹워스 고등부에 등록한 학생이 17명이었다. 그런데 예배당은 없었다. 내지 선교와 교회 확장을 위한 선교비로 3달러를 헌금하였고, 주일 학교 이사국에 1달러를 헌금하였으며, 미국 성서 공회에 1달러를 헌금하여, 총 5달러를 헌금하였다.

1911년 1월에 호놀룰루 제일 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6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김YS를  호노가이지 한인감리교회와 국구해리 한인 감리교회를 순회하는 순회 목사로 파송하였고, 작년에 이어 윤만C를 국구해리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황선경이 이 해에도 국구해리에 거주하였다면 김YS 목사와 윤만C 권사로부터 믿음을 키웠을 것이다.

황선경은 하와이섬 파할라로 이주했다. 그런데 그가 언제 파할라로 이주했는 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파할라는 남쪽으로 가는 찻길로 국구해리에서 100마일 떨어져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파할라는 1910년 이후 국구해리와 호녹가이지를 포함한 하와이 선교연회하의 순회 구역으로 지정되어있었다.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권사

 

191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된 제11회 하와이 선교연회는 한인 감리교회로서는 역사적인 연회였다. 연회 기간 중 그달 20일에 미국 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로부터 홍한식이 장로 목사 곧 정회원이 되었고, 김재성과 이관묵과 박세환이 집사 목사 곧 준회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와이 선교연회 기간 중 그달 18일 저녁 7시 30분에 호놀룰루에 거주하던 한국 사람이 많이 모인 가운데 한국인 대중 집회가 개최되었다. 프라이 감리사 부인이 지휘한 가운데 한인 청년 성가대가 주목받을 만하게 찬양하였고, 루이스 감독이 한국을 주제로 연설하여 한인 청중들이 크게 감사했다. 위의 한국인 대중 집회에서 하와이 선교연회 내내 통역하였고, 위의 대중 집회에서도 통역한 이승만 박사에게 프라이 감리사가 시계와 잉크 스탠드가 부착된 아담한 책상 등을 선물로 주었다. 그것은 하와이 선교연회가 이승만 박사에게 주는 하나의 찬사였고, 한인 소년학교 교장으로서 3년 동안 자원하여 봉사한 데 대한 감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감리사 프라이 박사와 루이스 감독은 이 박사의 사역에 크게 칭찬하였다. 마지막 찬송에 이어서 미국 육군 25연대 군목 스카트 목사가 축도한 후 폐회했다.  

이승만 박사 윌슨 S. 루이스 감독  윌리엄 H. 푸라이 감리사

1916년의 하와이 선교연회에서 감독 루이스 목사는 황선경을 하와이섬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박기홍을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를 목회하는 순회 목사로 파송하였다. 나알레후 한인감리교회는 파할라에서 남쪽으로 13마일 떨어져 있었다. 보고된 통계에서 보는 대로 순회 구역 명칭을 파할라로 한 것으로 보아 파할라 한인감리교회가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보다 나름대로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박기홍 순회 목사가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하지 않은 주일이나 주중에는 권사로 파송을 받은 황선경이 예배를 인도하였고 주중에도 목회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황선경이 파송되던 그달에 보고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통계는 나할레우 한인감리교회 통계와 합산한 보고였다. 주일학교가 두 곳에 있었으므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와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에 각각 주일학교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두 교회의 교사와 직원이 6명이었으며, 두 교회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0명이었다. 유아세례 교인은 8명이었고, 학습 교인은 5명이었으며, 세례 교인은 1명이었다.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도 별도의 예배당이 없었고, 두 교회 모두 헌금 내역이 보고되지 않았으므로 나할레우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파할나 한인감리교회가 매우 연약한 교회였음을 알게 된다. 

1917년 하와이 연회록을 찾을 수 없어 단정할 수는 없으나 1916년과 1918년에 황선경이 권사로 파송되었다는 정황을 미루어 볼 때 황선경이 1917년에도 파송되었을 것으로 본다. 1916년에 파송된 박기홍은 목사로 파송되었다. 그런데 박기홍이 파할라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는지 아니면 파할라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까지 순회하는 순회 목사로 파송되었는 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제13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개최되었다. 그해 감독은 A.W. 레오나르드 목사였다. 그해 연회 회원은 정회원 16명, 준회원 4명, 연수원 12명, 설교 목사 2명으로 총 34명이었다. 그런데 총 연회 회원의 반에 해당하는 17명이 한인 교역자였다. 이 중 정회원이 8명으로 조연택, 홍치범, 홍한식, 김이제, 이관묵, 이선일, 임준호와 박세환이었고, 준회원으로 2명으로 김재성과 송헌주였으며, 연수자가 7명으로 안시흡, 최상은, 한명교, 한영준, 박종수, 박기홍 그리고 송헌주였다. 그해 한인 총무는 임찬호 목사였고, 방화중이 한인 교역자를 위하여 통역인으로 활동하였다.

위의 선교연회에서 황선경이 3년째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되었다. 그해 조석진이 같은 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으며, 한명교가 같은 교회 목사로 파송되었다. 그런데 그 연회에서 보고된 주일학교가 3곳이었으므로 한인감리교회가 세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명교가 파할라 한인 감리교회 담임 목사가 아니라 세 한인감리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는 순회 목사로 파송된 것이다. 그렇다면 연회록에는 적시되어 있지 않지만,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와 다른 한 교회가 한명교 순회 목사 지도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할나 한인 감리교회만 권사와 전도사를 파송하였으므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가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와 다른 한 교회보다 교세가 컸다고 보인다. 순회 목사가 방문하지 않았을 때 권사였던 황선경이 조석진 전도사와 같이 파할나 한인감리교회를 목회하였다고 본다.

그달에 박기홍이 보고한 파할라 한인감리교회와 다른 두 교회의 통계를 2년 전의 파할라 한인감리교회와 나할레후 한인감리교회의 통계와 비교하면 파할라 한인감리교회가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유아 세례교인이 3명 적은 5명이었지만, 학습 교인이 18명이 많은 23명이었으며, 거기에 세례 교인이 20명 이상 많은 20여 명이었다. 주일 학교가 1곳이 많은 3곳에 있었고, 주일학교 교사와 직원이 1명 많은 7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20명으로 같았다. 그리고 결산과 관련해서는 전년도 보고서에는 재정 보고는 아예 없었지만, 그해 재정 보고에 금액이 적시되었음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해 재정 보고에 따르면 건물과 관련하여 지불한 금액 (임대비?)이 12달러였으며, 훈련을 위하여 12달러를 지급하였고, 다른 목적으로 24달러를 헌금하여 총 헌금액이 48달러였다.

세 한인감리교회에 각각 주일 학교가 있었을 것 같고, 각 주일 학교에 교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권사와 전도사와 목사가 각각 서로 다른 주일학교를 맡아 지도했을 것 같은데 황선경이 세 교회 중 한 교회를 지도했을 것이다.

1919년 3월에 제14회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하와이 선교연회 감독 매트 S. 휴즈 목사의 사회로 열렸다. 그런데 그해 선교연회록의 교회 명단에 파할라 한인감리교회가 없고, 목사와 전도사를 파송한 명단에도 파할라 한인감리교회가 없어 파할라 한인감리교회가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으레 그렇듯이 파할라에서 노동하던 한인 노동자들이 대거 다른 지역의 농장으로 이동하여 파할라 한인감리교회가 폐교한 것이다.

1919년 3월 이후 한인감리교회 황선경의 이름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서 찾기가 어렵고, 하와이 한인사회 언론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damien.sohn@gmail.com

 

11.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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